[정혜영의 근대문학을 읽다] '윤치호일기' 역사가 주는 교훈

입력 2017-02-04 04:55:05

젊은 시절의 윤치호
젊은 시절의 윤치호

1885년 어느 흐린 봄날 오후, 윤치호는 상하이 영국인 거주지 내 공원 의자에 앉아 황포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중국인은 출입이 금지되어서 윤치호 이외의 동양인을 찾기 어려웠다. 봄의 황포강에는 돛단배가 떠다니고 부는 바람에 꽃잎이 연신 떨어지고 있었다. 멍하니 앉아 있다가 인근 절에서 들려오는 종소리에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위에는 어둠이 내리고 있었고 옷에는 어느 틈엔가 꽃잎이 한가득 모여 있었다. 윤치호가 쓴 5월 24일 일기의 한 부분을 재구성한 풍경으로 쇠락해가는 나라에서 흘러온 이방인의 적막감이 묻어난다.

윤치호가 인천에서 미국 상선에 몸을 싣고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중국 상하이에 도착한 것은 1885년 1월 말이었다. 상하이행의 표면적 이유는 유학이지만 실질적 이유는 갑신정변 실패로 인한 신변의 위험에서 벗어나려는 것이었다. 미국 유학을 위해 상하이를 떠날 때까지 3년여 동안, 윤치호는 감리교 선교사가 설립한 중서서원에 다니면서 물리학, 지리, 화학, 역사, 영어 등의 근대적 학문을 공부하였다. 이 시기 체험은 '윤치호일기'(1883~1945)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상하이에 도착했을 때 윤치호는 스물두 살이었으며, 고종과 민비의 총애가 여전히 그의 마음에 깊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이 시기의 일기에는 잦은 몽정 때문에 병원 치료를 받거나, 기루에 가서 여자를 사는 것 같은 젊은 남성의 내밀한 경험, 그리고 부모를 향한 그리움과 고종과 민비에 대한 충성스러운 마음이 절제된 형태로 적혀 있다. 이와 더불어 한문에 대한 깊은 소양은 물론, 영어와 일본어, 중국어까지 능통했던 젊은 엘리트로서의 지적 호기심 역시 일기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예를 들자면 영어 수업 중심으로 진행된 중서서원의 근대적 교육 내용과 상하이 영국 서점에서 구입한 '영국사', '만국사' 같은 도서 목록까지 착실하게 기록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하이 시절 윤치호는 이질적인 두 세계를 함께 경험하고 있었다. 조선 황제의 충직한 신하 윤치호와 근대적 서구 교육 세례를 받은 민주적 인간 윤치호, 이 두 명의 윤치호가 서로 갈등을 일으키며 충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서 있던 곳은 영국, 독일, 미국, 프랑스 등 서구 열강의 조차지가 늘어선 상하이였다. 그 상하이에서 윤치호는 문명화되지 못한 채 서구 열강의 놀이터로 전락한 대국(大國) 중국의 현실을 뼈저리게 체험하고 있었다. 황제의 충직한 신하였던 망명객 윤치호가 근대적 자유인으로 변모해간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상하이 내 영국 조차지의 공원 문밖에서 출입조차 금지당했던 중국인들의 비참한 현실을 되밟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윤치호일기'는 상하이 시절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에도 계속되다가 그가 죽은 1945년이 되어서야 끝난다. 이 기간은 갑신정변을 거쳐, 경술국치가 일어나고, 일제의 식민통치가 지속되는 때였다. 이 기간에 윤치호는 조선의 자주와 독립을 염원하는 진보적 지식인에서 친일협력자로 변해갔다. 그런 만큼 '친일'이라는 선입견을 일단 걷어둔다면 아시아의 근대를 몸소 체험한 윤치호의 '일기'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참으로 많다. 증오심을 가지고 대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윤치호 자신도 말하지 않았던가. 중국과 사드, 일본과 위안부, 여기에 미국과 '트럼프'까지 겹친 이 시기, '윤치호일기'를 읽으면서 역사 속에서 교훈과 해법을 찾아보는 것도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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