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 1번지' 대구경북] "어려울 때 나눈다" 아너 소사이어티가 만드는 아름다운 세상

입력 2017-01-27 04:5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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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태 온천엘리바덴 대표
나우태 온천엘리바덴 대표
박언휘 박언휘종합내과병원 원장
박언휘 박언휘종합내과병원 원장
주천수 (주)삼우무역 대표
주천수 (주)삼우무역 대표

2017년 1월 10일 대구 사랑의 온도탑은 전국에서 가장 먼저 100℃를 넘었다. 특히 올해는 서문시장 화재로 인해 성금이 분산되어 목표액 달성조차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지만, 보기 좋게 빗나갔다. 경북 사랑의 온도탑 역시 설 연휴를 앞둔 1월 23일 96.3℃를 기록,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0.6℃ 높았다. 이런 추세라면 이달 말까지 목표 달성은 무난할 전망이다. 어려울수록 이웃과 나누는 대구경북인의 DNA가 올해도 유감없이 발휘된 것이다. 가족들이 함께 모이는 설 연휴를 맞아 '나눔 1번지, 대구경북'을 견인하는 아너소사이어티 회원들(이하 아너회원)의 이야기를 전한다.

◆키워드:

아너소사이어티(Honor Society)=2007년 12월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지도층을 대상으로 한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개인 고액기부자 모임. 미국의 최대 모금기관인 공동모금회의 고액기부자 모임인 '토크빌 소사이어티'를 모델로 시작됐다. 1억원 이상을 기부하거나 기부약정(최장 5년간)할 경우 가입할 수 있다.

◇나우태 온천엘리바덴 대표

"가난하고 연로하신 부모님은 자식이 성공할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으셨습니다."

나우태(60) 온천엘리바덴 대표가 매년 5월과 10월 각각 1천 명이 넘는 어르신들을 모시고 '목욕잔치'를 연 것은 2002년 나성하와이를 개업한 이후부터였다. 1989년 대덕목욕탕과 1991년 광천탕 시절에는 욕탕 규모가 적어 무료 초대권으로 어르신들을 모실 수밖에 없었는데, 시설 규모가 커지자 과감한(?) 결심을 한 것이다.

"지금도 (목욕잔치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거동조차 힘겨운 노인들을 그렇게 많이 한꺼번에 모시면 안전사고의 위험이 커다는 우려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게들 좋아하시니 앞으로도 계속할 작정입니다."

나 대표는 달성군 화원읍에서 11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태어날 때엔 가난과 질병으로 형제들을 떠나보내고 3남매만 남은 상태였다. 공납금이 없어 눈물로 지새면서 겨우 중학교를 졸업했다. 군대에 자원입대한 것이 삶의 전환점이 되었다.

인천 부평의 부대는 총포와 차량을 수리해 전방에 공급하는 곳이었다. 부대원들은 모두가 기름범벅이었고, 그 덕분에 목욕시설 하나는 국내 최고였다. 남달리 탐구심이 강했던 나 대표는 보일러 등에 문제가 생기면 3, 4일씩 잠도 안 자며 연구하고 해결했다. 스무살 안팎의 나이였지만, 부모님은 이미 팔순을 넘어 군복무 기간을 전후해 세상을 떠나셨다.

고향에 되돌아온 나 대표는 이미 선진기술을 익힌 최고의 기술자가 되어 었었다. 당시 목욕탕들이 연료를 벙커C유로 바꾸면서 많은 문제가 생겼지만, 나 대표에게 이런 건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기업의 규모가 커지면서 탐구열이 발동, 검정고시를 거쳐 아들 또래들과 함께 수능시험을 쳤고 이제는 MBA 과정까지 마쳤다.

"저에게 가난은 밑천이었습니다. 잃을 것이 없으니 겁나는 것도 없어서, 끝없는 도전이 가능했습니다." 나 대표는 "가난을 벗어나 나누는 기쁨을 누릴 수 있어 너무 행복하다"면서 "나누는 기쁨을 대물림하고 싶다"고 말했다.

석민 선임기자

◇박언휘 박언휘종합내과병원 원장

박언휘(63) 원장의 진료시간표를 처음 본 사람이면 누구나 깜짝 놀란다. 월'수'금 3일은 오후 9시까지 진료하고, 일요일'공휴일도 오후 1시까지 문을 연다. 쉬는 날이라곤 한 달에 한 번, 첫째 주 일요일만 쉰다. 첫째 이유는 아픈 사람은 제때 치료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한다는 것이었다. 문을 일찍 닫으면 갑자기 아픈 아이들이나, 타지에서 소문 듣고 찾아온 사람들이 크게 불편해진다는 설명이다.

박 원장의 고집(또는 소신)은 어릴 적 경험에서 나왔다. "울릉도에서 나서 자랐는데, 방학이 끝나면 친구들이 하나 둘 보이지 않았습니다. 육지에서는 그리 심각하지 않은 골수염이나 맹장염에만 걸려도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죽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박 원장도 어릴 때 아주 허약했다. 무리하게 공부를 못하도록 전깃불을 강제로 끌 정도였다. 그리고 이웃과 조그만 음식이라도 나눌 때면 꼭 박 원장을 시켰다. "이웃과 나누면서 살아야 네가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다." 어머니의 간절한 바람은 그 후 삶의 원칙이 되었다.

두 번째 이유는 '돈을 많이 벌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배가 고프고 아픈 사람에게는 밥과 약을 주어야 합니다. 가진 것이 적으면 그 마음을 제대로 나눌 수가 없습니다."

의과대학 2학년 때 아버지의 부도로 인해 박 원장은 졸지에 소녀가장이 되었다. 휴학 뒤 동생들의 학비를 벌어야 했다. 생활고가 어찌나 심했던지, 피를 팔려고도 했고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고민하기도 했다. 그때 어려운 사람들의 심정이 어떤지 절실하게 깨달았다고 박 원장은 회고했다. 그래서 박 원장은 장학금을 줄 때에도 감정과 느낌을 담지 않고 그냥 준다. 스스로 자신이 (장학금을 받을 만큼)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걸 깨닫길 바라면서 그렇게 한다.

박 원장은 유일한 유한양행 창업자, 정태일 한국OSG 회장, 윤인구 부산대 초대총장의 뒤를 이어 올해 제4대 '행복한 부자상' 수상자로 내정되었다.

석민 선임기자

◇주천수 (주)삼우무역 대표

"인생을 살아가면서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습니다. 이웃을 돕고 함께 나눌 수 있을 때 기꺼이 행동으로 실천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천수(70) ㈜삼우무역 대표는 본인에겐 인색하면서도 남을 돕는 일에는 누구보다도 앞장서는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만큼 경제적으로 성공하셨으면 이제는 좀 누리며 사시는 것도 좋다고 생각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몸에 밴 습관을 바꾸는 것이 어려웠다. 이대로가 좋다"고 했다. 그리고 "열심히 일한 것은 분명하지만 이만큼 성공하기까지 운이 많이 따랐던 것도 사실이다"며 겸손해했다.

주 대표는 대구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주 대표는 동생들 뒷바라지를 해야 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낮에는 기술을 배우며 야간 고등학교에 다녔다. 그러나 이마저도 중퇴해야 했다.

해군에 입대해 기관실에서 배운 전기기술은 삶의 밑천이 됐다. 전역 후 전업사를 차렸는데 일거리가 넘쳐났다. 당시에는 전기 사정이 좋지 않아 밤늦게 또는 새벽에 불려가는 경우도 많았다. 물론 출장비 같은 개념은 있지도 않았다.

"힘들다기보다는 일을 할 수 있어 행복하고 감사했습니다."

주 대표는 이를 기반으로 1978년 섬유회사를 차렸고, 1981년에는 무역회사까지 설립했다. 1980년대 말~1990년대 초에는 매년 2천만달러 이상 수출하기도 했다. 1987년 뉴욕 맨해튼에 대구기업 1호로 사무실을 낸 기억은 지금도 새롭다.

"이때 '1달러'를 벌기 위해 얼마나 피땀을 흘려야 하는지 절감했습니다. 지금도 달러가 아까워 외제 사용은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하지만 주 대표는 국내 나눔활동을 지속하면서 베트남, 아프리카 등으로 나눔의 폭을 글로벌화할 계획이다. 우리가 어려울 때 국제사회가 우리를 도와주었듯이, 이제는 우리가 어려운 나라들을 도와야 할 때라는 것이다.

본인의 아너회원 약정기간이 끝나면 부인과 아들들도 차례로 아너회원으로 가입시킬 계획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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