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회·양동마을은 전통 퇴색된 느낌
억지로 만들고 고치면 참가치 잃어
블랙리스트로 떠들썩한 문화계도
민간에 맡겨두면 스스로 이끌어가
30년 전 마야 문화의 발원지로 알려진 과테말라를 처음 찾았을 때, 세이바라고 하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유적지에 들른 적이 있다. 말로만 듣던 마야인의 흔적을 처음으로 접한다는 설렘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정글 속에서 1천 년 이상 묻혀 있다 보니 다 허물어 떨어진 돌덩어리하며 이끼와 나무 덩굴로 뒤덮인 피라미드 같은 건축물에서 마야인의 놀라운 솜씨와 정신세계를 상상하며 그리는 맛이 참으로 좋았다.
그로부터 20년 만에 다시 찾았을 때는 정문도 사립문에서 우람한 콘크리트 건물로 바뀌어 입구도 산뜻해졌고, 피라미드 제단도 예전처럼 자태가 멋지긴 했으나 뭔가 모를 거부감이 들었다. 20년간 사람 손이 많이 가서 그런지 고색창연한 맛이 많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비슷한 느낌을 지역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인 안동 하회마을과 경주의 양동마을을 다시 찾았을 때 가졌다. 오래전 하회마을에 갔을 때는 굽이쳐 흐르는 강물과 함께 옛날 사는 방식 그대로인 마을의 평화스러운 모습이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 같았고 문화라는 샘물을 흠뻑 들이켜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런 감동이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 다녀간 후에 생긴 무슨 방문 기념관 때문에 일순간에 다 사라져버렸다. 기념관이라는 건축물의 양식이 하회마을의 전통가옥과 전혀 조화를 이루지도 못하거니와 영국 여왕 다녀갔으니 세계적 명소가 되었다고 들떠서 마을 안에 선술집 팻말 내걸고 빈대떡을 팔게 하는 그런 식의 개발을 했으니 그 여왕님도 다시는 안 찾아올 것만 같다. 당시의 반짝 홍보 효과에 들떠 오랜 세월 이어질 옛 명승지를 이렇게 일그러지게 해야 하는 것인가? 양동마을도 마찬가지다. 유네스코 세계 인류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주차장도 크게 확장되고 관리 시스템도 효율적으로 바뀌긴 하였으나 500년 전통 마을의 모습은 많이 퇴색된 느낌이다.
해인사 올라가는 입구에 세워진 건물은 관에서 한 것이 아니라 사찰 자체의 필요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이것도 주변 산세와 고찰 해인사의 분위기와는 많이 동떨어진 느낌을 준다. 제주도의 올레길은 어느 개인이 스페인의 가톨릭 성지인 '산티아고 가는 길'에서 모티브를 얻어 자연스럽게 형성된 길이다. 이게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니 관에서 나서서 편의와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시멘트 길을 덧붙이고 사방팔방으로 멋지게 꾸민다고 인공미를 가미하였다. 제주의 올레길을 창안한 민간인의 취지는 어디 가버리고 반듯하지만 어색한 분위기를 감돌게 만들었다.
문화라는 것은 인간만이 만들고 누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일부러, 억지로 만든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한 공동체가 살아오면서 서로 주고받고 공감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공통적인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이 자리 잡을 때 참다운 '문화'가 되는 것이다. 인위적으로 어느 특정인이 또는 특정 계파가 이를 획일화하려 할 때 그건 이미 문화로서의 참가치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자연경관이나 현상을 인간이 가공하고, 덧붙이고 비틀면 우리는 그것을 보고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한다. 문화도 마찬가지다. 문화라는 냇물이 흐르도록 내버려둬야지 흐르는 방향이 내 마음에 안 맞는다고 물길을 바꾸면 그건 원래의 문화가 아니다.
지금 무슨 문화계 블랙리스트 갖고 옳으니 그르니 떠들썩하다. 좌파적 색채를 없애야 나라가 산다는 애국적 주장을 하는 것까지는 애교로 봐줄 수 있다. 그럼 문화 융성이라는 구호는 외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런 것도 문화 융성의 일환이라고 주장하면 우리가 자식들 교육을 왜곡하는 것이 된다. 좌파를 막기 위해 우파적 색깔의 문화만을 고양한다면 그건 히틀러식 강압 문화 정책과 무슨 차이가 있으며 북한이 획일적으로 만들어내는 문화 정책 방식과 뭐가 다른가? 좌든 우든 정부는 지나친 간섭을 삼가야 한다. 그냥 민간에 맡기면 된다. 우리 민초의 수준이면 더 자정 능력이 있고 지나치면 스스로 고치고 상호 간에 견제한다. 자연과 문화는 내버려두면 더욱 자연스러워진다. 우리가 개발한다고 또 융성한다고 욕심을 안 부리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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