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째 아들내미가 계란 프라이가 먹고 싶다고 난리다. 아침이면 가장 만만했던 반찬이 계란이었으니 찾을 만도 하지. 계란은 프라이로, 찜으로, 말이로, 국으로 다양하게 요리해 내놓을 수 있다. 가장 간편하고 값싼 서민들의 반찬으로 이만한 게 없다. 하루하루 레시피만 돌려가며 바쁜 아침 식사는 계란으로 때워 왔으니 한 달째 구경도 못한 계란이 아들도 궁금하긴 한가 보다. 아들의 하소연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마트에서 계란 한 판을 만지작거리다 그냥 왔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장을 보러 왔는데 선뜻 장바구니에 담을 만한 식재료가 없다. 겨울철에 가장 단맛이 좋다는 무도 어느새 가격이 올랐는지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려 가며 고심 끝에 사기로 결정했다. 그동안 식료품을 살 때면 가격표도 제대로 보지 않고 장바구니에 건성으로 담고는 했는데 최근엔 몸값 높아진 식품들을 집으로 고이고이 모셔 오는 수준이다. 가벼운 장바구니에 무거운 영수증을 들고 마트를 나서면서, 입 밖으로 터져 나오는 한숨에 땅이 꺼질 지경이다.
뜨끈하고 시원하게 끓여낸 무국 하나로 특별한 반찬도 없이 부실하게 차려낸 밥상에 온 가족이 둘러앉았다. 저녁식사를 하며 무심히 흘러나오는 뉴스를 시청한다. 주요 식료품 가격은 지난해 하반기 태풍의 영향과 원자재 가격 인상, 환율 변동, 국제 유가 상승 등이 복합적으로 맞물리면서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고 한다. 성의 없어 보이게 차려낸 밥상이 내 탓만이 아닌 것을 뉴스가 설명해 주고 있어 다행이다. 그런데 밥상에서만 끝날 문제가 아니라는 소식에 가족들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서울시는 하수도 요금을 10% 올리기로 결정했고 내후년까지 매년 10%씩 계속 인상한다는 방침을 세웠단다. 종량제 쓰레기봉투값도 올랐고, 광역버스 요금도 인상하면서 다른 버스 요금의 상승을 압박할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제를 책임지고 있다는 정부 관계자가 "설을 대비해 생활물가 안정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인터뷰를 하는데, 내 귀에는 공허한 메아리처럼 들린다.
가족들의 한숨은 다음 뉴스에서 눈물로 바뀌었다. 여수 수산물 시장의 화재 사고 현장이 화면에 비쳤다. 땅을 치며 오열하는 상인들의 모습에 가족들은 훌쩍이기 시작했다. 100여 개가 넘는 점포가 불에 탔고 특히 설을 앞두고 차례용품과 수산물을 많이 확보한 상태에서 화재가 발생해 상인들의 피해액이 50억원 가까이 될 것이라고 한다. 안 그래도 힘든 불경기에 명절 대목을 앞두고 사고를 당한 상인들을 생각하니 같은 서민으로서 동질감이 느껴지며 '측은지심'이 들었다. 그런데 이어지는 보도에 사고 현장이면 꼭 나타나는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겉으론 '서민'이고 싶으나 '진짜 서민'은 아닌, '서민인 척'하는 이들. 절대다수인 서민 표를 얻기 위해 서민 이미지를 강조해 보지만 '어설픈 흉내 내기'를 하다가 꼭 걸리고 마는. 이번 사고 현장에서도 화마가 휩쓸고 간 처참한 자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자고 한 정치인이 있어 논란이 됐다고 한다. 어린 아들내미의 눈치를 보며 입 밖으로 터져 나오는 몹쓸 단어를 꾹 삼키고 만다.
서민과 다소 유리된 생활을 하다 보면 그들의 아픈 마음을 미처 다 헤아리지 못할 수는 있다. 하지만 서민의 마음을 공감할 수 없다면 '측은지심'이라도 갖추고 있어야 하거늘. 옛말에 '측은지심 인지단야' (惻隱之心 仁之端也)라고 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어짊의 시작이라는 의미다. 선거용 쇼와 이벤트가 아닌 진정 측은한 마음을 가지고 어질게 사회를 이끌어 갈 지도자가 절실한 시점이다. 이제 또 한 번의 선택의 시간이 다가온다.
뉴스를 보던 남편은 결국 냉장고에서 소주 한 병을 꺼내 온다. 오늘도 기울이는 소주 한잔에 서글픈 서민의 마음을 위로받는다.
댓글 많은 뉴스
나경원 "李 장남 결혼, 비공개라며 계좌는 왜?…위선·기만"
이 대통령 지지율 58.6%…부정 평가 34.2%
트럼프 조기 귀국에 한미 정상회담 불발…"美측서 양해"
김기현 "'문재인의 남자' 탁현민, 국회직 임명 철회해야"
李대통령, 대북전단 살포 예방·사후처벌 대책 지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