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출입 기자 시절 여러 대구경북(TK) 국회의원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TK 국회의원들은 대한민국의 정통 보수 세력의 후예라는 점을 하나같이 자랑스러워했다. 특히 한나라당, 새누리당으로 이어지는 정통 보수당의 뿌리가 TK라는 자부심도 가득했다. 당내 수도권 국회의원들이 '산토끼'(비TK표)를 잡기 위해 '집토끼'(TK표)를 홀대해도 '결국 집토끼를 버릴 수 없을 것'이란 너그러움과 여유로움으로 웃고 넘길 수 있었던 배경에도 TK가 정통 보수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이 마음 깊숙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TK 정치인들은 보수의 원칙에서는 물러서지 않았지만 국가 발전이라는 대의명분 앞에 정치적 이익을 뒤로 물리는 넉넉함도 있었다. 선비 정신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기에 특유의 염치와 체면도 중시했다. 이런 의미에서 고(故) 이만섭 전 국회의장과 강재섭 전 한나라당 대표는 대표적인 TK 정치인이었다.
사석에서 만난 이 전 의장은 특유의 꼬장꼬장한 목소리로 햇병아리 정치부 기자에게 "사랑과 정치는 계산하면 안 된다"고 일장 연설을 하곤 했다. 정세 판단력이 유달리 뛰어났던 강 전 대표는 2006년 7월 한나라당 대표에 당선된 후 첫 방문지로 당시 수해를 입었던 전남 여수를 방문했다. 기자간담회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발언이 나왔다. 그는 "근대화 시대에 동서 균형 발전에 미흡했고, 인재 발굴에 차별이 없지 않았던 것에 대해 호남인들에게 사과한다"며 정중한 예를 갖췄다. 갑작스러운 사과 발언에 기자들도 놀랐다. 왜 사과를 하느냐는 질문에 "당 대표이고 민정당 시절부터 시작해서 5선의 오랜 정치 경력을 갖고 있는 제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최적임자"라고 했다. 한나라당의 뿌리는 TK라는 말로도 들렸다. TK 출신 당 대표가 아니었으면 이런 발언을 하기 쉽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문제의 핵심을 꿰뚫어보는 능력이 탁월했던 박종근 전 국회의원과 평소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지만 자신의 원칙에 누구보다 철저했던 고(故) 이해봉 국회의원 등도 대표적인 TK 정치인이었다.
TK가 정치적 기로에 섰다. 그동안 TK는 보수 꼴통이라고 욕을 얻어먹으면서도 정치적 선택에서 흔들리지 않았다. 한국전쟁에서 대한민국 체제를 지켰고, 근대화를 이끌었다는 자부심이 밑바탕에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런 TK 민심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마지막까지 지켜냈고, 조국 근대화의 중심이었다는 자긍심에 큰 상처가 났다. 상처의 발단은 아이러니하게도 TK가 그토록 지지했던 박근혜 대통령이었다. 비선 실세의 국정 농단에 힘을 실어준 정황들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대통령을 제대로 보좌하지 못했던 TK 친박 정치인들에게도 잔뜩 화가 나 있다. 대통령을 앞세워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우선한 것 아니냐는 질타도 나온다. 지난 총선의 공천 과정과 선거 이후의 새누리당 내에서 보여준 친박의 패권적 행태에 앞장선 모습에 실망감도 적지 않다. 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이후에는 새누리당 TK 정치인들이 점점 고립돼 가는 형국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모습을 보면서 앞에서 언급했던 TK 정치인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꼬장꼬장한 목소리로 후배들을 질타했던 이 전 의장과 용기 있게 사과할 줄 알았던 강 전 대표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했을까? 지금의 새누리당 TK 국회의원들과는 크게 달랐을 것이다.
권력은 유한해도 TK에 뿌리를 둔 삶은 영원해야 한다. 스스로 변하지 않으면 타인의 힘에 의해 바뀔 수밖에 없다. 그때는 허탈감과 자괴감이 동반된다. 변화는 고통스럽다. 그러나 변해야 할 때 변하지 않으면 더 고통스러운 상황이 다가오는 것이 인생사다. 우리는 변화할 준비가 돼 있는가 아니면 참기 힘든 고통을 맛본 후에야 변할 것인가.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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