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사대계' 30권이 발간되었다. 정확한 이름은 '신라 천 년의 역사와 문화'이다. 총서 22권, 자료집 8권이며, 5년 동안 힘을 기울여 완성하였다. 여기에 요약본 개설서 2권이 공간될 예정이고, 이를 중국어, 일본어, 영어로 번역하면 모두 38권이 된다. 동원된 필자만 136명이니 신라사를 연구하는 어지간한 학자들은 망라했다고 하겠다. 아마 이처럼 방대한 작업은 앞으로 50년 아니 100년 안에는 다시 할 수 없을 것 같다. 전공 분야에 맞게 필자를 위촉하는 것도 어렵거니와 서술 체제의 통일, 내용의 중복 방지, 이설의 조정, 쉬운 글쓰기 등 너무 많은 힘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2016년 12월 8일 경주에서 경상북도가 발간을 선포한 신라사대계는 해방 후 70년간의 연구성과를 녹여낸 '쉽게 풀어쓴 21세기 새 신라사'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신라사대계를 간행할 만큼 신라사 연구를 촉발시킨 것은 무엇이었을까. 대학이 늘어나면서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고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진 데에 일차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연구의 심화를 가져온 계기는 무엇보다 새로운 금석문의 발견이 아닐까 생각한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중국과 일본의 한국 관련 문헌자료도 연구의 심화에 기여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 사서는 2차 사료들이다. 신라 당시에서 수백 년 또는 1천 년 이상의 세월이 지나 후대인의 인식과 생각이 많이 반영된 자료였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해방 후 신라의 영역이었던 수도 경주와 그 주변 경상도 일대에서 이른 시기의 신라 금석문이 많이 발견된 점은 특기할 만하다.
주요한 것만 손꼽아 보아도 포항 중성리신라비, 포항 냉수리신라비, 울진 봉평리신라비, 영천 청제비, 경주 명활산성작성비, 대구 무술오작비, 울주 천전리서석, 단양 적성비 등을 열거할 수 있다. 대상 시기는 6세기 초반이 많아, 신라에서 가장 오래된 살아 있는 사료였던 것이다. 이들 금석문은 그 이전에 발견된 경주 남산신성비 제1비, 창녕 진흥왕 척경비, 황초령'마운령'북한산의 진흥왕 순수비 등과 함께 신라사 연구의 주요 사료였다. 이들 자료들을 통해 문헌자료만으로는 알 수 없는 사실들을 새로 밝히거나 수정'보완할 수 있었다. 신라의 대외적 팽창 과정은 물론, 신라 6부의 운용, 갈문왕의 실체, 왕실 및 근시조직, 지증왕이 즉위 후 바로 왕을 칭할 수 없었다는 사실 등을 알게 되었다.
또 각종 유적 발굴이 성행하면서 절터, 석탑, 산성, 고분 등지에서 많은 문자자료가 출토되었다. 이들 자료들은 새로운 정보들을 제공해주는 한편, 과제도 많이 남겨 주었다. 바야흐로 신라사 연구는 후대에 편찬된 2차 자료보다는 당대의 사람들이 남긴 1차 자료를 이용하여 연구하는 방향의 일대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새로 떠오르고 있는 목간 자료도 빼놓을 수 없다. 한국 고대 목간은 대략 600점 정도가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월지, 월성해자, 황남동, 경주박물관 부지 등 경주에서 발견된 것이 100여 점, 함안 성산산성에서 발견된 것이 308점, 그리고 울산, 창녕, 김해 등에서도 몇 점이 발견되었다. 함안 성산산성 목간에서는 낙동강 상류와 중류 지역에서 낙동강을 이용하여 쌀, 보리, 피 등의 곡식을 함안의 성산산성으로 운반한 사실이 밝혀졌다.
경상도는 신라 금석문의 보고다. 경상북도에서 신라사대계를 발행하기로 한 데는 그곳이 신라의 옛터라는 점을 우선 고려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38권이라는 거질로 꾸밀 수 있었던 데는 가치 있는 새로운 금석문의 출현이 뒷받침되었던 것이다. 역사란 사실을 중시하는 학문이며, 재해석의 학문이다. 시대가 바뀌고 새로운 자료가 추가되면 종래의 해석을 다시 음미하고 새로 써야 한다. 신라사대계를 '쉽게 풀어쓴 21세기 새 신라사'라고 부르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