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그러운 바람소리 잠재우기로 했다
고정희의 '화육제 별사'③
살아남는다는 것은/보다 단순해지는 것이라고 너는 말했다/그러나 친구여/우리가 수유리를 떠나오고/누추한 출판사 혹은/잡지사 기자로 전진하는 동안/다치지 않으려고 몸을 사리고/외롭지 않으려고 패를 짜는 동안/달콤한 숙면에 길들고 있을 때/녹슨 우리의 망치를 들어/뒷등을 탕 치는 손은 누구?/결국 그랬지, 친구야/(중략)/나는 수유리로 다시 돌아와/무교회주의자가 되고/수유리에 떠도는 칼바람 소리와 만나/칼바람과 살기로 약속하였다/오 수유리에/ 유엔 평화깃발을 꽂기로 했다/우렁우렁 사랑가 풀어내기로 했다/그렇게 해서라도/저 징그러운 바람 소리 잠재우기로 했다(고정희의 '화육제 별사' 부분)
겨울이 깊다. 봄비 같은 겨울비. 마른 마음에 자꾸만 달려왔던 기억들이 흩날리는 겨울비 속으로 하나 둘 사라진다. 변하는 것은 시간만이 아니다. 공간만이 아니다. 사람만이 아니다. 존재하는 시간과 생활하는 공간과 만나는 사람이 달라지면서 '다치지 않으려고 몸을 사리고' '외롭지 않으려고 패를 짜기도' 하고, '달콤한 숙면'에 길들기도 했다. 그건 사실 단순해지는 것이었다. 살아가는 삶이 아닌 살려지는 삶. 수유리는 이미 수유리가 아니었다.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꿈, 우리들의 희망, 우리들의 열정, 우리들의 바람이었다. 아직 '평화깃발'을 꽂지도 못했는데, '우렁우렁 사랑가 풀어내'지도 못했는데, '저 징그러운 바람 소리 잠재우'지도 못했는데 나는 이미 단순해져 버렸다. 그것이 슬펐다.
세상은 한 치 앞을 바라보기 어려울 정도로 어둡다. 만나는 사람마다 '이게 나라냐'고 울분을 쏟아낸다. 부정부패니, 정경유착이니, 권언유착이니 하는 것들은 이미 뉴스거리도 아니다. 그런 것들이야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일이고, 사람이 바뀌면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 일은 자존심 때문에 견딜 수가 없다. 꼬집어 표현할 수 없는 안에서의 분노가 국민들의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 시가 좋아서 시를 읽으며 평생을 살아왔는데도 이렇게 쓸쓸한 적은 없었다. 역시 시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누군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그 때문에 시는 위대한 것이라고 하지만 100% 모두를 동의하진 못하겠다. 어차피 시도 사람이 쓰는 것이고, 사람이 사는 삶에 대한 이야기라면 최소한 사람과 삶에 대한 언어는 자유로워야 한다. 이것은 말해도 되고, 저것은 말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 그건 이미 시가 아니다. 사람의 삶이 정치라면 시도 결국은 정치다.
고정희는 지리산에 영원히 숨었다. '저 징그러운 바람 소리 잠재우지' 못하고 우리 곁을 떠났다. 그리고 시가 남았다. 당연히 그 시는 나의 것이고, 시에서 노래한 꿈은 우리 몫이다. 세상은 여전히 칼바람 소리로 가득하지만 지금이라도 숙면에 빠진 나를 깨워 징그러운 칼바람 소리를 잠재워야 한다. 새해가 밝았다. 여전히 세상은 징그러운 바람 소리로 가득하지만 언젠가는 우렁우렁 사랑가 가득한 세상이 올 거라는 기다림으로 우리는 여기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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