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문의 한시 산책] '큰일 하는 데는 다 때가 있다'는 다산의 가르침

입력 2016-12-10 04:55:12

오늘 밤 둥근 달을 놓치지는 마시게나

정약용

벗이여! 달빛 아래 술을 한잔하려거든 友欲月下飮(우욕월하음)

오늘 밤 둥근 달을 놓치지는 마시게나 勿放今夜月(물방금야월)

오늘 당장 마시잖고 내일로 또 미룬다면 若復待來日(약부대래일)

뜬구름이 바다에서 일어날지 누가 알랴 浮雲起溟渤(부운기명발)

만약에 그다음 날로 또다시 미룬다면 若復待來日(약부대래일)

환하고 둥글던 달이 이지러져 버릴걸세 圓光已虧缺(원광이휴결)

*원제: 고시(古詩). 유배지 장기에서 지은 27수의 연작 가운데 14번째 작품.

1801년 2월 9일,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신유박해(辛酉迫害)에 연루되어 한양 감옥에 투옥되었다. 19일 만에 겨우 풀려났으나 머나먼 경상도 장기(포항시 장기면) 땅으로 터덜터덜 유배 길에 올랐다. 같은 사건으로 인해 자형 이승훈과 셋째 형 정약종이 대역죄로 참수(斬首)를 당했고, 둘째 형 정약전도 신지도로 유배를 떠나게 된 상황이었다. 발걸음이 정말 무거웠고, 가슴에 만 가지 감회가 어렸다.

"아버님은 아시나요, 모르고 계시나요(父兮知不知)./ 어머님은 아시나요, 모르고 계시나요(母兮知不知)./ 가문이 난데없이 끝장이 나버렸고(家門欻傾覆)/ 죽음과 삶이 이렇게 갈렸어요( 死生今如斯)./ 남은 목숨 어떻게 부지한다 하더라도(殘喘雖得保)./ 큰일을 하기는 이제 다 글렀어요(大質嗟已虧)…."

유배 길에 오른 다산이 부모님의 산소에서 작별을 고하며 지은 하담별(荷潭別)이란 작품의 일부다. 절망과 비탄, 통분과 회한으로 온통 뒤범벅이 되어 있으며, 장기에서 지은 한시들에서도 거의 일관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한 점에서 위에서 소개한 작품은 같은 시기에 지은 다산의 작품 가운데 대단히 특이하다 이를 만하다.

보다시피 화자는 벗에게 뜬금없는 충고를 한다. 달빛 아래 술을 마실 생각이 있거든, 오늘 밤에 떠오른 저 둥근 달을 놓치지는 말라고. 오늘 밤에 마셔야 할 술을 자꾸만 내일로 미루다 보면, 저 환한 달빛 아래 술을 마실 기회가 영영 사라지고 말 수도 있다고. "오늘 배우지 않고 내일이 있다고 말하지 말고(勿謂今日不學而有來日), 올해 배우지 않고 내년이 있다고 말하자 말라(勿謂今年不學而有來年)." 주자(朱子)의 이 말씀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어릴 때부터 이와 같은 가르침을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다. 하지만 '오늘 마실 술을 절대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정말 신선하고 난데없는 가르침은 다산 선생께 처음으로 듣는다. 집안이 박살 난 상황 속에서 처량하게 유배살이하고 있던 다산에게 도대체 어떻게 이 엄청난 여유와 풍류가 남아 있었을까? 혹시 작품 전체가 '큰일을 하는 데는 다 때가 있다'는 하나의 거대한 비유가 아닐까 몰라.

어쨌거나 겨레의 큰 스승이신 다산의 가르침을 거역할 수는 없는 일이니, 며칠 뒤 보름달이 휘영청 뜰 때는 내 기어이 술 한 상 차려야 되겠네. 아무리 바빠도 보름달을 쳐다보며 막걸리 한잔 마실 여유조차 없다면, 아니 도대체 그 무슨 바보 등신 얼간이에다 꿔다놓은 보릿자루 같은 멋대가리 없는 인생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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