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함민복의 '꽃'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서/ 담장을 보았다/ 집 안과 밖의 경계인 담장에/ 화분이 있고/ 꽃의 전생과 내생 사이에 국화가 피었다(함민복의 '꽃' 부분)
변산반도에 모항이란 이름을 지닌 해변이 있다. 조개껍데기처럼 둥글게 누워 있는 해변에서 밀물이 다가왔다가 썰물로 밀려가는 풍경을 하루 종일 바라본 적이 있다. 바닷물이 밀려가면 백사장이 드러나고 밀려오면 사라졌다. 매일 반복되는 풍경들이 묘하게 슬펐다. 죽음이라는 것이 다가온다면 이런 장소에서 죽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면 저 백사장은 육지일까, 바다일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다. 이런 곳을 경계라 하지 않을까? 경계의 사전적 의미는 사물이 어떠한 기준에 의하여 분간되는 한계를 뜻한다. 실상, 경계란 그 자체로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경계란, 두 대상을 갈라놓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실체가 없기에 그것은 순간적이며, 만질 수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다.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선인 까닭이다. 이 선은 투명할 수밖에 없고 이 선은 빛처럼 빠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계는 끊임없이 나와 세상을 구분한다. 나와 타인, 아군과 적군을 돌려세운다. 충돌하고, 차별하고, 단절시킨다. 사실 우리나라 역사는 경계를 가운데 둔 대립의 역사와 다름 아니다. 바로 거기에 어쩌면 이 시가 지닌 힘이 있다. 모든 경계에 꽃이 핀다면? 그 두 세계가 서로 소통하고, 화해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만날 수 있다면?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사이에 길이 있다'고 말했다. 신영복 선생님은 '담론'에서 '경계에 선다는 것은 진영 논리를 배격한다는 뜻이지만 이미 세계가 분절되어 있다는 세계관을 전제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연암은 사이의 긍정적인 측면을, 신영복 선생님은 사이 자체의 부정적인 면을 지적하고 있지만 심층적으로 바라보면 모두 사이와 경계에 대한 깊은 사랑이 묻어나는 진술이다. 사이는 경계의 다른 이름이다. 자주 경계에서 머물렀다. 거기에서 재미있게 놀기도 했다. 편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는 21세기의 한국에서 경계에 머문다는 건 위험한 일이다. 경계에 머물면 회색이라고 비난하는 일도 흔했다. 어쩌면 이제 경계의 힘을, 사이의 위대함을 믿어야 하는 시간이 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이 시끄럽다. 오늘도 200만 명이 모인단다. 예전에는 감히 나올 수 없는 소리들이 세상을 가득 채운다. 두려운 것은 그렇게 만들어진 소리들이 또 다른 경계를 만들지는 않을까 하는 점이다. 좋아하는 시인에게 문자를 보냈다. '세상이 어둡습니다.' 바로 답이 돌아왔다. '세상은 늘 어두웠어요.' 우문현답이다. 그래도 우린 숨을 쉬며 살았다. 손을 잡아주며 살았다. 어깨를 보듬으며 살았다. 사랑하며 살았다. 제발 이번만은 모든 경계에 꽃이 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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