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되찾아야 할 대구 정신, 현진건

입력 2016-11-18 04:55:05

19일 대구중앙도서관 시청각실에서 '2016년도 현진건문학상 시상식'이 열린다. 올해로 8년째를 맞지만 여전히 세인들의 무관심 속에 수상자들과 일부 문인들의 조촐한 행사로 끝날 것이다.

흔히 일제강점기 유명 소설가로만 알고 있는 현진건은 우리 대구가 그렇게 쉽사리 잊고 홀대해도 되는 인물이 아니다.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이며, 한국 최고의 문인이었던 현진건이야말로 '대구 정신'을 가장 잘 보여주는 역사적 인물이다.

빙허(憑虛) 현진건은 1900년 8월 9일 대구시 중구 계산동2가 169번지(현 계산성당과 현대백화점 사이)에서 태어났다. 재종형 상건은 고종의 밀사를 띠고 유럽 각지를 돌며 독립선언문을 전달하다가 러일전쟁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상해로 망명하였다. 큰형인 홍건은 러시아 통역관으로 근무하며 독립군을 도왔고, 둘째 형 석건은 변호사로서 독립운동가 변론을 도왔다. 빙허가 가장 영향을 받은 셋째 형 정건은 1928년 중국 상해 '한인청년동맹'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하다 검거되어 신의주에서 옥사하였고, 그 충격으로 형수 유덕경이 자결한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빙허는 16살 때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독일어 전수학원을 졸업한 뒤, 상해로 건너가 호강대학 독일어 전문학부에 입학했다. 귀국하여 대구 출신 이상화, 백기만, 이장희 등과 교우를 갖는다. 1920년 개벽 11월호에 '희생화'로 등단하여 1922년 박종화, 나도향, 이광수, 홍사용, 이상화 등과 '백조' 동인이 되면서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한다. 이때 이상화를 백조 동인으로 인도한 것도 그였다.

빙허는 우리나라 단편소설의 수준을 끌어올렸다. 김동인과 더불어 당대 최고의 신문학 개척자였고, 염상섭과 더불어 당대 최고의 사실주의 소설의 개척자였다. 박종화, 채만식, 오상순, 방인근, 김일엽, 최정희, 김동인, 안석영, 박영희, 염상섭 등과 깊은 교류를 가지며 창작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술 권하는사회'(1921년), '빈처'(1921년), '타락자'(1920년), '운수 좋은 날'(1924년)은 식민지 궁핍한 현실을 작품으로 고발한 자전적 소설이다. 1939년 장편 '무영탑' '적도' '선화공주' 등 역사소설은 민족의 울분을 달랬다. 장편 5편, 중편 1편, 단편 33편, 번역 5편, 평론 6편, 수필 5편, 기행문 4편, 동화, 수상 등 62편의 작품을 남겼으며, 최근 '사공'이 발견되어 화제가 되고 있다.

또 빙허의 삶에서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살사건은 빼놓을 수 없다. 이 역사적 사건의 주인공은 당시(1936년) 동아일보 사회부장이었던 현진건이었다. 주범으로 투옥되고, 면직되어 작품활동도 못하게 됨에 따라 장편 '흑지상지'의 동아일보 연재도 52회를 마지막으로 중단됐다. 가난에 허덕이면서도 마지막까지 조국을 걱정하던 그는 1943년 4월 25일 생을 마쳤다.

대구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자랐으며 대구 여자와 결혼하여 평생 대구 말을 사용한 대구 토박이 현진건, 지금 대구에서 그의 흔적을 찾긴 어렵다. 범어네거리 인근 궁전맨션의 대형 벽화에도 현진건은 빠져 있다. 현진건은 왜 이렇게 철저하게 외면받고 있는가?

돈 있고, 힘 있는 작가는 친일시비에도 불구하고 문학관'문학비가 전국에 널려 있다. 하지만 독립운동에 모든 걸 바친 빙허의 집안은 가난하다. 모교 동창'제자도 없다(유학). 그렇다면 대구시라도 앞장서야 하지 않을까. 만시지탄이 있지만, 100년을 버티다 못해 기울어져 가고 있는 그의 발자취가 유일하게 남아 있는 대구시 중구 소재 신혼집이라도 문화재로 지정해 대구 정신을 지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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