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내 주제는 안녕하신가

입력 2016-11-14 04:55:05

중학교 시절, 처음으로 시에 눈을 떴다. 도서관에서 발견한 서정주의 '화사집' 속 '귀촉도'와 학교 방송으로 들은 모윤숙의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를 통해서였다. 하지만 훗날 그네들의 친일 행적을 알고 나서, 나는 퍽 크게 상처를 받았다. 그 충격의 힘이 어찌나 셌던지 심지어 문학이 힘들어지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일어났던 시적 공명까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할 수는 없었다. 시는 일단 시였다.

이면(裏面), 겉으로 나타나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 그 이면이 적나라한 인물들의 예는 우리나라 역사 속에 허다할 것이다. 하지만 정조가 지은 수원화성을 내려다보며 지낸 여고 시절을 추억하는 의미에서, 그쪽에서 사례 하나를 찾아보았다.

'북학의'(北學議)는 정조시대 북학파의 선구적 학자였던 박제가의 저서로, 당시 사회적 위기에 직면해 있던 18세기 후반의 조선을 개혁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쓴 글이다. 하면 북학파는 무엇인가. 백성의 생활에 직결된 학문인 '북학'에 뜻을 모은 자들로 이용후생(利用厚生)을 통한 백성들의 생활 안정, 특히 상공업의 중흥을 강조했다. 당시는 사농공상으로 서열화된 사회였기에 그들의 주장은 분명 혁신적이었다. 하지만 깊숙하게 들어가 보면, 박제가는 중국을 지나치게 선망했을뿐더러 조선을 비판하는 데서 나아가 부정하기까지 한 인물이었다.

외국의 경우에는 '결혼행진곡'으로 잘 알려진 바그너를 들 수 있겠다. 그의 곡은 이스라엘에서는 듣기 어렵다. 바그너가 유대문화 자체를 박멸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정도로 극렬한 반유대주의자였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훗날 히틀러에 의해 나치의 공식적인 음악으로 쓰이기까지 했겠는가. 그런데 유명한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과 주빈 메타가 이스라엘에서 바그너의 곡을 연주한 적이 있다. 그들 또한 유대인이었기에 적잖이 고민했을 터이지만, 결국 바그너를 연주한 것이다. 역사가 무얼 말하고 있든, 차마 그의 음악까지는 무시할 수 없었던 거라고 짐작한다.

문학과 예술로 입신한 이들이 정치적인 행보나 사생활에서 문제점을 드러낼 때, 그들의 작품에 영혼까지 휘둘려본 사람은 거의 재앙 수준의 절망을 느끼게 된다. 나도 익히 경험한 바다. 그리고 최근 문단에서 벌어진 일들을 보면, 분명 그로 인한 재앙을 현재진행형으로 맞고 있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쯧쯧. 하지만 '읽던 자'에서 '쓰는 자'로 입장이 달라지고 보니 내게도 그 일이 강 건너 불이 아닌 게 되어버렸다. 하여, 고민 중이다. 내 인성은 과연 얼마나 오염되어 있는지, 내가 과연 문학을 해도 될 만한 주제인지, 그 정도를 가늠해 보느라고 말이다. 이번엔 나를 위하여 쯧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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