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 희망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입력 2016-11-12 04:55:02

"그분(자비로우신 예수)과 함께하는 이생에서의 삶에 대한 희망과 위안의 힘을 도둑맞지 않게 하십시오."

올해 9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행한 일반 알현 가르침의 마지막 문장이다. 교황의 여러 파격적인 언사들이 있었지만, 그중 가장 중심적인 단어는 (하느님의) 자비와 (인간의) 희망이다. 보통 우리는, 누군가를 격려할 때 "희망을 가지세요"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교황은 "희망과 위안의 힘을 도둑맞지 않게 하라"고 한다.

이 두 가지 말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희망을 가져라'는 격려의 전제에는 개인이 희망을 잃어버리고 또다시 찾아야 할 주체이다.

그런데 '희망의 힘을 빼앗기지 않게 하라'는 것은 우리 시대의 현실을 생태적으로 공동체적으로 보라는 '뼈가 있는' 말이다. 곧 희망을 잃은 상태 안에는, 희망을 잃은 개인과 그에게서 빼앗아간 사람 내지 어떤 구조와 또 그런 현실을 변화시키지 못한 모든 이의 공동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희망을 잃은 이들에게 '네 책임'으로 떠넘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책임'으로 함께 인정하고 실행하라는 것이다.

희망을 잃어버린 것인지, 빼앗긴 것인지 두고 봐야겠지만, 우리나라는 어쨌든 정치적으로 희대의 사건 속에 싸여 있다. 그뿐만 아니라, 국지전으로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되는 중동, 아직도 기근에 어린아이들이 죽어가는 남미와 아프리카! 우리 시대는 한마디로 삶의 의미와 희망의 상실이라는 거대한 시련 안에 들어와 있다. 이 시련의 상황 안에서 우리는 로고테라피(의미요법)를 개발한 빅터 프랭클(1905~1997) 박사의 말을 한 번 새겨볼 필요가 있겠다.

로고테라피에 의하면 인간은 삶의 의미를 세 가지 방식으로 찾을 수 있다. 첫째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둘째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셋째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삶의 의미에 다가갈 수 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관계는 비교적 쉽게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세 번째 인간은 아무리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운명과 마주쳤을 때에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데는 설명이 필요하다. 이에 대해 빅터 프랭클 박사는 하나의 사례를 든다.

한번은 나이 지긋한 한 사람이 우울증 때문에 상담을 받으러 왔다. 그는 2년 전에 세상을 떠난 아내에 대한 상실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아내를 이 세상 누구보다 사랑했다. 박사는 그를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말을 최대한 아끼면서 물었다.

"선생님, 만약 선생께서 먼저 죽고 아내가 살아남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가 말했다.

"오 세상에! 아내에게는 아주 끔찍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걸 어떻게 견디겠어요?"

그 의사는 "선생님, 부인께서는 그런 고통을 면하신 것입니다. 부인의 그런 고통을 면하게 해 주신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다"라고 말했다.

이 경우 비록 정상적인 의미의 치료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바뀔 수 없는 운명에 대해 절망하지 않고 시련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게 된 삶의 자세 변화를 강조한다. 하지만, 세 번째 의미 파악의 과정에서 빅터 프랭클 박사는 확실하게 한 가지를 첨부해 두었다.

"의미를 발견하는 데에 시련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는 단지 시련 속에서도-그 시련이 피해갈 수 없는 시련일 경우-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만약 그 시련이 피할 수 있는 것이라면 시련의 원인, 그것이 심리적인 것이든, 신체적인 것이든, 정치적인 것이든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인간이 취해야 할 의미 있는 행동이다. 불필요하게 고통을 감수하는 것은 영웅적인 태도가 아니라 자기학대에 불과하다"(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2부', 이시형 옮김, 청아출판사, 2012, '시련의 의미, 165~175쪽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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