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준희의 문학노트] 안도현의 '가을 엽서'

입력 2016-11-12 04:55:02

가을 하루를 살았다

안도현의 '가을 엽서'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안도현, '가을 엽서' 전문

오랜만에 가을 속에서 하루를 살았다. 머리를 채우던 복잡한 생각도 모두 접고 6년 가까이 지켜보기만 하던 뜰을 걸었다. 뜰 곳곳에는 크기를 달리한 수많은 사물들이 나를 반긴다. 눈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마음으로 만나는 것이 얼마 만이냐. 바람이 몰아오는 구름 더미가 지독하게 무겁다가 조금씩 가벼워진다. 힘겹게 걸어온 길들이 저만치에서 나를 비웃고 있다. 외줄타기처럼 공허하고 위험한 공간에 물에 젖은 감나무 이파리가 서글프다. 나무그늘에 서서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이파리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젖어가는 퇴행현상에 힘이 들었다. 그립다, 보고 싶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고 대립과 갈등, 부정과 부패, 핑계와 증오, 배신과 비난으로만 가득 찬 언어들이 세상을 떠돈다. 가을바람 몰아오는 빈 공간이 온통 그대 떠날 때의 눈동자처럼 쓸쓸했다.

아직 나뭇잎은 나름대로 푸르다. 가을이 온전히 깊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그들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곧 스스로 내려야 하는 것을. 그 내려앉음이 세상의 풍요로움을 만들어 준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차가운 겨울 시간을 견디는 그들만의 생존 방법임을. 위로 오르는 것으로만 생존을 지속시킬 수 없고 아래로 내려야 하는 것으로 생존이 지속된다는 것을. 겨울 동안 나무는 위로의 성장을 멈추고 뿌리로 모든 것을 내려앉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랜 시간 나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나와는 다른 길, 나와는 다른 생각, 나와는 다른 삶들에 대해 여전히 내 기준으로 재단한다. 길이 다르면 생각이 다르고, 당연히 삶도 다름은 당연하다. 그래도 그들에게 묻고는 싶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사랑은 왜 낮은 곳을 바라봐야 하는지를. 그렇게 내가 향하는 사랑은 낮은 곳에 오래도록 머문다. 여전히 가을은 쓸쓸했다.

그럴 때가 있었다. 밤새도록 하얗게 밤을 새우고 쓴 편지를 아침 햇살에 부끄러워 찢어버리던 때가. 그러면 찢어지지 않고 분명 남아 있었던 글자가 있었다. 외로움. 이제 저녁이다. 이 가을 저녁,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걸 느낀다. 끝까지 소멸하지 않고 남아 있었던 글자처럼 외로움이 나를 지배한다. 이런 시간이 두렵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안도현 시인은 아직도 시를 쓰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 가을은 더욱 쓸쓸하다. 시인의 유일한 소통의 통로인 트위터의 한 글귀로 마무리한다. '낙엽을 보며 배우는 것 한 가지, 일생 동안 나는 어떻게 물들어가야 하는 것, 떠날 때 보면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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