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창] 크라스노다르의 은행나무

입력 2016-10-25 04:55:02

경북대(석사)
경북대(석사)'모스크바 국립사범대(박사) 졸업

南러시아 소도시에 한류 바람 거세

교환학생은 현지 팬들의 선망 대상

동양학 노교수 한국 은행나무 심고

논문 쓴 제자들과 의식처럼 술 따라

남러시아를 오랜만에 오게 되었다. 소치에서 멀지 않은 크라스노다르 쿠반국립대 개최 국제학회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10년 전만 해도 낙후되었다는 느낌이 컸는데 많이 변한 것 같다. 감지되는 가장 큰 변화는 동양인에 대한, 특히 한국인에 대한 반응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최초로 남러시아를 방문한 기억은 2000년대 초반 아르마비르라는 곳이었다. 전(全)러시아 작가동맹이 주최한 학회가 소도시에선 나름대로 사건이었는지 지역 방송국에서도 취재를 오고 꽤 많은 사람들이 발표를 들으러 왔다. 몇 안 되는 외국인 참가자들 중에서도 동양인은 관심의 대상이라 질문도 꽤 받았는데, 한 중년 신사가 나중에 따로 찾아와 말을 건넸다. 그래도 당신은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라고 말이다. 5년 전 교류하던 협동농장 출신 '한국인'들이 왔는데, 영양실조로 다들 병색이 짙었고, 고기를 내놓자 너무 급히 먹고 탈이 나서 병원에 실려 갔단다. 그랬다. 나름대로 식자라고 자부하는 사람조차 남한과 북한을 별개로 생각지 못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 그 몇 년 후에도 가봤지만 거리마다 남아 있던 소련식 명칭과 레닌 동상을 보면 여전히 남러시아의 도시들은 과거 소련 시절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

그런데 참 많이 변했다. 이곳 크라스노다르에서 차로 몇 시간만 가면 동계올림픽이 열렸던 소치가 나온다. 조지아와 아르메니아도, 아제르바이잔과 터키도 멀지 않다. 소치 동계올림픽 이후 이곳도 급격히 발전하고 있다. 길도 잘 닦여 있고 거리도 깨끗해졌으며, 사람들의 표정도 밝아졌다. 한류의 영향인지 무엇보다도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표상이 달라졌다. 학회에서는 한국과 러시아의 상호관계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한국 경제, 문화, 사회에 대해 발표를 한다. 중앙아시아 국가 중 가장 폐쇄적이라고 여겨졌던 투르크메니스탄 학자도 한국과의 상호 교류와 발전적 관계에 대한 기대를 드러냈다.

학회 발표장은 교수와 대학원생들뿐만 아니라 어린 학생들로 가득하다. 동원이라도 했는가 생각했더니 그게 아니란다. 다들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은데, 한국 관련 학회를 한다니 '구경'을 온 것이라고 했다. 이틀에 걸친 학회 기간 동안 이들은 자리를 뜨지 않고 열심히 경청을 하고 진지하게 질문도 한다. 학회 발표를 하러 온 우리 대학원생 주변을 러시아 학생들이 둘러싸고 질문 공세를 해댄다. 최초로 교류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한국 학생들은 동양인이라고 놀리는 사람들 때문에 힘들었다는데, 이젠 달라졌단다. 이곳에서 공부하는 교환학생들은 한국인이라서 오히려 덕을 많이 보고 있다고 했다. 한류 팬들 덕분에 배척이 아니라, 환영을 받고 서로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는 선망의 대상이라고도 했다. 러시아 학생들 몇몇이 다가와 서툴지 않은 한국어로 인사를 건넨다. 한국어를 배우고 싶지만 제대로 된 선생님이 없어서 독학으로 한국어를 공부했다고 한다. 동방학부 교수님은 한국어를 가르칠 수 있는 선생님을 파견해달라고 부탁도 한다. 기존에는 중국과 일본을 전공하려는 학생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한국학을 희망하는 학생들이 많아졌다고도 한다. 우려되는 점이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반갑고도 또 고무적인 변화이다.

동양학 대가인 노교수가 우리를 대학 건물 앞 화단으로 데려갔다. 그곳엔 가느다란 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었는데, 노랗게 물든 잎 모양이 눈에 익다. 예전 한국에 교환교수로 왔다가 은행을 가지고 와서 이곳에 심은 것이란다. 이렇게 잘 자라고 있다고, 모르긴 해도 이곳 최초의 은행나무일 거라고 자랑을 했다. 제자들이 논문을 쓰고 나면, 함께 데려와서 의식처럼 나무에 술을 따른다니, 그것도 인상적이다.

한국의 은행나무가 남러시아 땅에 뿌리를 내린 것처럼 어렵게 싹을 틔운 한국과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이 이곳에 제대로 뿌리내릴 수 있기를, 그리고 천 년 이상을 사는 은행나무처럼 굳건히 오래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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