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리의 핏빛 목소리<8>-제2회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최우수상

입력 2016-10-25 04:55:02

삽화 이태형 화가
삽화 이태형 화가

◇아버지 방에는 늘 친구들로 붐볐어

엄마, 남동생과 함께 큰방에 있었지. 사랑방에는 아버지의 친구 대여섯 명이 놀았어.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웠어. 골목에 나가볼 엄두조차 못 냈어. 뚫린 문구멍으로 내다볼 때는 어른들이 잡혀간 뒤였어. 겁에 질려 꼼짝 못 하고 있었지. 한참 뒤에 누군가가 아부지의 시신을 업고 오더군.

"돌아가신 아버지는 어디를 다쳤는지요?"

"직접 보지 못했어. 엄마에게 들은 얘긴데, 칼날이 옆구리를 관통했다 하더군. 작은아부지도 같은 날, 화를 당했어. 하룻밤에 아부지와 작은아부지를 함께 잃었어. 우리 집 외에 형제가 사망한 사람이 또 있잖아?"

이해봉'이경조 형제도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사망했다.

"장례는 어떻게 치렀지요?"

"어떻게 연락이 닿았는지 시천동에 사는 진외가 식구들이 와서 장례를 치렀어. 관은 생각할 수도 없고 돗자리에 둘둘 말아 붉은디 지명 밭에 묻었어. 작은아부지와 함께. 삼촌은 장가들고 얼마 되지 않았지. 그때 작은엄마 배 속에는 만삭이 된 아이가 있었어. 그 애는 자기 아부지 죽고 한 달 뒤에 태어났지. 그가 바로 사촌 동생 배유순이야. 의지할 데가 없는 동생을 외가에서 보살폈어. 남동생 '정화'는 마을에서 천재라고 소문났지. 아버지가 살아계셨더라면, 상급 학교에 보내어 큰 자리 하나 해 묵었을 낀데. 동생마저 명이 짧아 일찍 죽었어. 참 아까운 동생인데."

초등학교 선배인 배정화는 머리가 뛰어났다. 내가 열세 살 때, 그와 함께 박원효 훈장에게 천자문'동몽선습'명심보감을 배웠다. 책거리에 앞서 처음부터 끝까지 막힘없이 외웠다. 놀라웠다.

#15. 사망자 배명규 34세. 장녀 배정숙 8세. 경북 영천

새색시를 데려다 놓고

"새색시를 집에 데려다 놓고 작은아버지는 화를 당했어. 삼촌은 일본 징용에 끌려갔다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어. 사건 나기 일 년 전, 같은 마을에 장가를 들었지. 결혼하여 일 년을 묵혀 신부가 시집오는 것이 그때의 풍습이잖아? 삼촌은 잔치에 놀러 온 고모를 동촌까지 모셔다 드린 뒤, 사랑방에 놀러 갔어. 우리는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고. 공비들이 방문을 왈칵 열면서 '돈을 내놓아라'고 윽박지르더군. '우리 집은 가난하여 줄 돈이 없다'고 할매는 말했어. 놈들은 삼촌이 일본에서 가져온 가방을 마구 뒤져 자루에 담아 넣더라고. 불을 지르라는 놈들의 소리에 마구간에 있는 소를 몰고 나왔어. 최재현의 논 마당에 말띠기를 박고 이까리를 맸지. 동네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논 마당에 가봤어. 시체가 즐비하고 아수라장이야. 목과 배에 칼을 맞아 돌아가신 삼촌을 찾아 공비알에 묻었어."

"숙모는 결혼한 지 일 년을 겨우 넘겨 홀몸이 되셨군요?"

"그렇지. 얼마나 참담했겠노? 우리 집에 얼마 동안 계시다 재혼했어. 슬하에 자녀가 없으니 연락할 일도 없고."

큰 조카인 배영호와 통화했다.

"사건 터질 즈음, 철공소에 취직하여 대구에 있었어. 작은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리를 듣고 이튿날 집에 왔지. 마을 전체가 잿더미가 되고 핏자국이 흥건하더군. 눈 뜨고 볼 수 없더라고."

#16. 사망자 배복식 27세. 조카 배정호 13세. 경기도 일산, 조카 배영호 16세. 경기도

의협심 강한 삼촌은

주위가 어수선하여 어머니는 나에게 어서 방으로 들어가라고 채근했어. 희생당한 삼촌은 강단이 컸어. 삼촌은 구룸마 소달구지를 끌고 하양장에 갔다 오면서 우리 집에 들렀더군. 엄마가 내어놓은 농주 한 사발을 맛나게 드시고 아버지와 함께 사랑방에 갔어. 삼촌은 정미소 마당에 끌려가 막다른 골목에서 당했어. 공비에게 대항하다 더 많이 다쳤지. 무자비한 놈들의 칼날은 삼촌을 난자했어. 그들은 삼촌이 현장에서 죽은 줄 알았던 모양이야. 공비들이 물러간 뒤, 정신을 차린 삼촌은 태촌 어른 집 쪽으로 피신했어. 그 어른이 칼에 찔린 삼촌의 배와 손바닥을 바뿌제로 둘둘 말아 짚동 사이에 숨겨줬다 하더군.

작은아부지는 이내 돌아가셨어. 피를 너무 많이 흘렸고, 칼날이 명치를 관통했던 모양이야. 의료'통신'교통수단이 없어 별도 조치를 취할 수 없었으니. 요즘 같았으면 살릴 수도 있었을 터인데. 어머니는 정신없이 불을 껐어. 요행히 가옥 전체는 불타지 않았어. 이튿날, 군경이 현장을 검색했을 때 방차암 어른의 떨어져 나간 손목을 정미소 앞, 도랑에서 발견했어.

"아버지는 어떻게 무사했는지요?"

"아부지는 그날 저녁 왠지 일찍 집에 오고 싶었다" 카더라고.

#17. 사망자 배암구 32세. 아들 배영수 4세. 조카 배영규 13세

징검다리를 건너면서 아버지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초등학교 4학년이었어. 사건이 터지기 두 달 전, 9월쯤일 거야. 생포한 공비 한 명을 보았어. 공비는 신한동 간이학교 울타리 앞에 쭈그려 앉아 있더군. 총을 든 군인이 지키고 있었고. 부상한 공비는 무척 괴로워하는 모습이었지. 망원경과 기관총도 처음 구경했어.

"열한 살이었으니 그날의 기억은 뚜렷하겠군요?"

"그렇지. 기억에 생생해. 당일은 영천에 있는 친척의 결혼식 날이야. 고모님과 먼 친척들이 우리 집에 모였어. 느닷없이 낯선 사람 여러 명이 총을 겨누며 '주인 어디 갔느냐?'고 다그치더군."

"아버지는 박부동 어른과 거랑 건너 대동리 구판장에 술을 자시러 갔어. 불길이 하늘을 치솟는 것을 보고 아버지는 허겁지겁 징검다리를 건너왔어. 그때는 다리가 없었지. 홍수가 나면 징검다리는 제구실을 못 하잖아. 정신없이 건넜을 아버지의 바지는 물에 흠뻑 젖었을 거야. 아버지는 놈들에게 붙잡혀 훼나무보에 끌려가 변을 당했어. 가슴에 총을 맞고, 얼굴에도 큰 상처를 입었어. 아버지는 놈들이 그토록 악랄하게 죽일 줄은 몰랐을 것 같애. 돌아가신 아버지를 이웃 어른이 업고 들어왔어. 그즈음, 삼촌네 집은 불이 활활 타고 있었어. 우리 집을 향해 넘어오는 불길을 향해 마구 물을 뿌려 댔지. 다행히 우리 집은 불타지 않았어. 다음 날 외가의 친척이 장례를 치렀어. 경황이 없어 땅을 파고 묻기 바빴어. 공산주의, 말만 들어도 치가 떨려. 스물여섯에 군에 입대하여 월남전에 자원했지. 참전 유공자 증서를 받았어. 이것이 돌아가신 아버지께 조금의 위로가 됐으면 좋겠네."

고인이 자주 건넜던 징검다리는 추억이 짙게 배어 있다. 팔공산에서 내려오는 거랑에는 징검다리가 여럿 있었다. 강물이 정강이에 차오르면 드러나는 소녀들의 뽀얀 속살, 소년의 가슴은 콩닥이지 않았던가. 지난날, 팔공산은 옷을 벗고 있었다. 장대비가 퍼부을 때면 누런 흙탕물이 쏜살같이 달려왔다. 사건이 터지던 날, 정신없이 돌다리를 건넜을 때, 임의 핫바지는 흠뻑 젖었으리라.

#18. 사망자 배종희 33세. 장남 배일수 11세. 영천시 범어동

박기옥

1949년 경산 와촌 출생. 모리코트상사 대표. 현 경산문인협회 회장. 수필집 '고쳐 지은 제비집' '소금 세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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