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 여지와 빨간 머리

입력 2016-10-24 04:55:05

'여지'(荔枝)는 중국 남부가 원산지인 식용 열매다. 중국 하이난(海南)에는 수령 600년에 가까운 여지나무를 볼 수 있는데 열대 지역에서 흔히 보이는 과실수다. 우리에게는 생소한 과일이지만 뷔페식당 후식 메뉴에 종종 오르기도 한다.

여지는 '양귀비의 과일'로 유명하다. 여지 맛에 반한 양귀비는 5월이면 당(唐) 현종을 채근했다. 왕은 상하기 쉬운 여지를 손에 넣기 위해 날랜 말과 기수를 보내 빨리 운반하도록 명령했다. 여지의 고장 광둥에서 도성인 장안까지는 2천㎞가 넘는다.

당나라 때 시인 피일휴(皮日休)의 '혜산'이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승상이 차 마시고 싶을 때마다/현령은 늦어질까 걱정하며 재촉했다지/오관(吳關)에서 도성까지 삼천리 길인데/양귀비가 여지 좋아한 것을 비웃지 마시오.' 차를 좋아한 고관대작의 등쌀에 물맛 좋다는 혜산 샘물을 보내느라 백성은 죽을 맛이었음을 풍자한 시다. 시인은 왕의 여자가 즐긴 과일 때문에 수많은 양민이 겪었을 고초에 빗대 노래한 것이다.

'비선 실세'로 불리는 최순실 모녀의 행각이 벌집 쑤셔 놓은 듯하다. 자고 나면 새 의혹이 드러난다. 이번에는 '빨간 머리' 뜻을 가진 테스타로싸(Testa Rossa)라는 카페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한 신문은 최순실이 이 고급 카페를 아지트처럼 운영하며 정'관'재계 유력 인사와 접촉한 정황이 있다고 보도했다. 미르'K스포츠재단과 관련된 각종 의혹이 불거지자 몇 달 전 돌연 문을 닫았지만 독일에 똑같은 이름의 카페를 운영 중이라는 것이다.

사실 테스타로싸는 페라리가 1950년대 생산한 전설적인 스포츠카 모델이다. 1957년형 페라리 250 테스타로싸는 모두 22대만 생산됐는데 2009년 캐나다에서 902만유로(약 150억원)에 낙찰돼 경매사상 최고가를 기록했다. 호주 경마 경기에서 여러 차례 우승한 테스타로싸라는 경주마도 있다. 최순실 명의의 유령 같은 사업체 '더블루K'에 이어 '빨간 머리' 카페가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짐작되는 대목이다.

근본적인 배경은 대통령의 관심이다. 며칠 전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박 대통령은 두 재단을 통한 사업이 매우 의미 있다며 두둔성 해명을 했다. 대통령 말 한마디에 번갯불에 콩 볶듯 재단이 설립되고 수백억원의 기금이 걷혔다. 이 돈으로 실세니 황태자니 하는 이들이 은밀히 일을 벌이다 탈이 난 것이다. 여지와 혜산 샘물, 테스타로싸는 제각각 이름이 다르지만 본질은 같다고 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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