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준희의 문학노트] 이덕규의 '풍향계'

입력 2016-10-22 04:55:01

그 배후가 궁금하다

이덕규의 '풍향계'

꼬리지느러미가 푸르르 떨린다/그가 열심히 헤엄쳐가는 쪽으로 지상의 모든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그러나 그 꼬리 뒤로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더 멀리 사라져 가는,/초고속 後爆風(후폭풍)의 뒤통수가 보인다/그 배후가 궁금하다(이덕규, '풍향계' 전문)

세상이야 원래 시끄러운 것이지만, 그 시끄러움이 쌓이면서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이지만, 최근의 시끄러움은 사소하게 보이지 않는다. 배후라는 말이나 실세라는 말이 미디어를 채운다. 배후라는 단어가 포함하고 있는 명료하지 못함은 반복되는 의문을 생산해낸다. 명료할 때 배후가 박용할 공간은 없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달라진 것이 있다. 그것이 바람직한 것인지는 판단하기 어렵지만, 어떤 상황을 만나면 표면만이 아니라 자꾸만 그 이면이 보인다는 것이다. 사실 이면을 들여다보는 것은 버겁다. 손바닥을 보여주면 그것만 봐야 하는데, 그것이 아주 편한 삶인데 손등이 궁금해서 견딜 수 없다는 건 고역이다. 대부분의 시선들은 역사가 헤엄쳐가는 방향으로 집중된다. 거기에 집중하는 시선은 그 꼬리 뒤로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사라지는 무언가를 보지 못한다. 진실은 언젠가는 드러난다. 빠르게 사라지는 무언가가 오히려 시간과 공간을 지배했다는 것도 안다. 역사는 표면이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면이 구성해간다는 것도 깨닫는다.

문이 보였다. 문이란 단어가 가진 의미는 출입과 관련되어 있다. 주인도 출입을 허락하고 나도 들어가고 싶은데, 그리고 주변의 모든 시선도 이미 문 안으로 들어가는 나를 인정하고 있는데 문밖에서 내 발을 잡고 있는 누군가가, 또는 주인의 뒤에 얼굴을 숨기고 서 있는 누군가가 자꾸만 보인다. 그것은 내가 모르는, 알 수도 없는 그래서 보이지도 않는 거대한 세력이다. 그로 인해 땅에 붙어 꼼짝하지 않는 내 발에는 신기하게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들어가지 않는 나만 바라볼 뿐이다. 사실 내 마음과 발이 분리되기 전까지는 그 문의 존재조차 몰랐다. 그렇다고 분리된 다음, 그 '빈-틈'을 외면해버릴 수 있는 소박한 용기조차 나에게는 없었다. 돌아서 버릴까? 돌아서면 마음조차 흔쾌히 내 발을 따라나설 것인데도 그러기도 어렵다. 문 저편에 숨 쉬는 무엇인가가 나에게는 너무나 매력적인 무엇이기 때문일 게다. 그 '빈-틈'이 언젠가는 메워질 것이라는 가능성의 믿음으로 아픈 건 사실 문 저편에 이미 가 있는 내 마음이다. 긴 시간의 두께가 만들어낸 근원적인 내 마음 말이다.

'풍향계'는 경기 화성에서 농사를 지으며 시를 쓰는 이덕규 시인의 첫 시집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에 실린 시이다. 그는 탐욕스러운 문명의 물결을 강인하고 선이 굵은 남성적 체취를 풍기며, 부유하고 유랑하는 바람과 구름의 이미지, 빛나고 날카로운 칼과 독의 이미지로 노래하였다. "시골에서 농사지으면서 시 농사도 짓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시인. 시인은 풍향계가 미리 알려주는 후폭풍에 주목한다. 나아가 그 후폭풍을 만드는 배후에 주목한다. 지금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만 휩쓸리지 말고 배후를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선, 2016년을 살아가는 지금의 우리가 반드시 가져야 할 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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