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 광기를 방관한 罪…제국과 국민, 공명의 수렁

입력 2016-10-08 04:55:01

비스마르크에서 히틀러까지/제바스티안 하프너 지음/안인희 옮김/돌베개 펴냄

독일 근현대사의 핵심인 '독일 제국(도이치 제국)의 몰락'에 대해 살펴보는 책이다. 히틀러를 결핍의 관점에서 본 '히틀러에 붙이는 주석'(1978)과 나치 시대를 산 독일인들의 내면 풍경을 그린 '어느 독일인 이야기'(2000)를 펴낸 독일 국민 작가 '제바스티안 하프너'의 1987년작이 이번에 처음 국내에 소개된다.

독일 제국은 비스마르크(1815~1898) 총리 시절부터 히틀러(1889~1945) 총통 때까지 80여 년간(1867~1948) 존재했다. 이 기간 독일 제국을 채운 콘텐츠는 전쟁 또 전쟁이다. 중세 이래 서유럽에서 가장 영토가 크지만 실은 여러 연방 국가의 연합체에 지나지 않았던 독일은, 빌헬름 1세가 프로이센 왕위에 올라 비스마르크를 총리로 등용하면서 통일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이 과정에서 비스마르크는 철혈(鐵血) 정책을 바탕으로 덴마크, 오스트리아, 프랑스와 잇따라 전쟁을 벌여 승리한다. 마침내 프로이센은 독일 제국을 세운다.

'철혈'이라는 단어가 주는 이미지가 그렇고 부단히 전쟁을 수행했다는 이력이 그래서 우리는 비스마르크를 군국주의자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결코 전쟁 제국을 의도치 않았다. 비스마르크가 바란 것은 제국의 팽창이 아니라, 작은 도이칠란드(독일)였다. 다른 민족은 배제하고 독일 민족만의 작은 통일 국가를 세우는 것이 비스마르크의 목표였다. 그리고 당시 전쟁은 '궁극적 이성의 일, 곧 가장 진지한 최종 정책 수단'일 뿐이었다.

여기서 저자는 비스마르크의 의도와는 달리 독일 제국은 건설 때부터 거대 전쟁 제국의 씨앗을 품게 됐다고 지적한다. 당시 독일에서 '이왕 커진 김에 좀 더 커져야겠다'는 대국 본능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앞서 1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전쟁을 거의 일으키지 않았던 독일이 전쟁의 맛을 알았다고나 할까. 여기에 휘발유처럼 퍼부어져 불을 지피기 시작한 것이 바로 민족주의다. 이미 오래전부터 독일인들은 스스로 유럽 최고의 민족이라는 '자뻑'을 해왔다. 이걸 부추기고 또 응집시켜 '나치즘'으로 구현한 사람이 비스마르크 이후 나타나 독일 제3제국을 세운 히틀러다. 히틀러는 비스마르크와는 전혀 반대로 큰 도이칠란드를 모색했다. 그래서 1차 세계대전은 독일에게 기회였고, 여기서 패배한 독일은 또 다른 기회를 얻고자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것이다.

이 책의 미덕은 비스마르크 시대와 히틀러 시대를 비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독일 제국이 몰락의 길을 걷는 동안 사회 구성원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어떻게 잘못 판단하고 또 움직였는지에 대해 냉소적인 시각으로 비판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당시 독일인들이 해도 해도 너무할 정도로 오판했다고 주장한다. 민족의 생존을 위해 주변 강대국의 동맹을 찢으려고 분투했지만 그럴수록 점점 고립됐다. 강한 민족주의에 파묻힌 국민들은 1'2차 세계대전의 패색을 너무 늦게 알아차렸고, 히틀러를 민족의 구원자로 오인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군 지휘부마저 전쟁의 결정적 국면마다 전략을 잘못 세웠다. 저자는 히틀러를 반대한 사민당을 비롯해 당시 독일의 좌파 및 자유주의자들도 비판한다. 예를 들면 사민당은 상당 기간 독일 최대 정당이었지만 결정적인 시기에 늘 주저하고 타협하고 굴복하며 역사를 바꿀 기회를 내팽겨쳐버렸다.

이 책은 또 다른 독일 통일(1990년 동독과 서독의 통일) 직전인 1987년에 나온 책이다. 저자는 3년 뒤 있을 역사적 사건을 예측하지 못했다. 그러나 저자는 이 책에 다시 수정을 가하지는 않았다. 이유는 이렇다. 1990년 10월 3일 독일 통일 당시 온갖 자화자찬이 나왔지만, 저자는 독일 통일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통일의 문제가 계속 나올 수 있다고 봐서였다. 이 책이 계속 문제를 제기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여긴 셈이다.

과거 통일 독일은 세계를 파멸 직전으로까지 몰고 가는 문제를 일으켰다. 이후 다시 통일된 독일은 얼핏 보기에 유럽 제1의 경제 대국이자 유럽연합(EU)의 리더로 활약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최근 자동차 회사 폭스바겐이 디젤 배출가스 조작 사건을 일으킨 것이나 유럽 최대 투자은행인 도이치방크의 파산 위기로 금융 위기 우려가 확산되고 있는 것은, 지난 20년간 좀처럼 보지 못했던 독일의 균열이다. 저자는 책 맨 끝에서 말한다. "(역사는) 바로 코앞의 일도 내다볼 수가 없다"고.

무엇보다도, 이게 과연 독일만의 문제일까. 과거의 과오를 냉철하게 짚어 현재를 살피고 미래를 계획하는 일은, 복잡다단한 근현대사를 지나 온 우리에게도 절실한 일이다. 비스마르크 같은 이나 히틀러 같은 자가 있었나, 그들은 지금 어떤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나, 정의가 뭔지 알았지만 실력을 행사하지 못해 결국 방관자가 되고 만 사람들은 또 누군가, 그리고 지금 우리는 나치즘을 닮은 이런 저런 시류에 휩쓸린 채 살고 있지는 않은가.

320쪽, 1만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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