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그는 그날 왜 그 자리에 있었을까

입력 2016-10-08 04:55:01

영남대 졸업. 현 예술문화협동조합
영남대 졸업. 현 예술문화협동조합 '청연' 상임이사. 현 복합문화공간 '물레책방' 대표

그날 그는 서울 광화문 광장에 있었다. 전국에서 10만 명 넘는 이들이 함께 참가한 민중총궐기 집회 현장이었다. 행진 도중 종로구청 앞 네거리에서 경찰 차벽에 막힌 그는 몇몇 집회 참가자와 함께 경찰 버스에 밧줄을 걸어 잡아당겼다. 경찰은 그들을 향해 물대포를 쏘았다. 그는 경찰이 쏜 직사 살수를 얼굴에 맞고 그대로 쓰러졌다. 그를 쓰러뜨린 물대포 수압은 50층 빌딩까지 솟을 정도의 수치(2천800┒)였다고 한다. 이미 쓰러진 그의 몸 위로 직사 살수가 몇 차례 더 이어졌다. 그는 현장에서 어떤 구호조치도 받지 못한 채 44분이나 걸려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살수 거리 제한, 수압 조절, 가슴 이하 살수, 부상자 구호조치 규정 같은 운용 지침은 전부 지켜지지 않았다. 그날 그에게 쏟아진 살수(撒水)는 살수(殺水)였다.

그날 그가 그 자리에 있었던 이유는 '쌀 수매가 현실화 공약 실현'을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대통령이 대선 출마 당시 쌀 수매가를 17만원에서 21만원으로 인상하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라는 정당한 요구였다. 그 약속은 그러나 다른 공약들과 함께 파기되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에 따르면 현재 쌀값은 21만원이 아니라 되레 13만원으로 폭락했다고 한다. 대통령의 공약(公約)은 공약(空約)이 되었다.

물대포에 의한 외상성 뇌출혈로 의식불명에 빠진 그에게 아무도 사과하지 않았다. 강신명 당시 경찰청장은 "집회 시위에 경찰 진압 과정에서 누군가 사망하거나 다쳤다고 무조건 사과할 건 아니다"라며 "법률적 책임 원인을 명확히 해야 하는데 결과만 가지고 사과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하긴 대통령이 사과하지 않는데 누가 대신 책임지고 사과할까. 과거 농민대회 과정에서 사망한 두 농민의 유가족과 국민에게 참모들의 만류에도 대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한 전직 대통령을 기억한다.

그의 가족들은 살인미수와 경찰관 직무집행법 위반 등으로 경찰을 처벌해 달라고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다. 그러나 조사는 사건 발생 7개월 만인 지난 6월에야 이뤄졌다. 그마저도 경찰 지휘부에 대한 조사는 빠진 채였다. 그는 인공호흡기에 의지한 채 혼수상태로 317일을 버티다 자신의 칠순 생일 다음 날이었던 9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한 언론은 그를 "국가가 '원격'으로 살해한 최초의 한국 시민"이라고 보도했다. 그가 물대포를 맞았던 종로 도심에는 그를 추모하고 검경의 부검 강제 시도를 규탄하는 내용이 담긴 유인물 수백 장이 뿌려졌다. 거기 대통령이 죽인 거라고 적혀 있었다. 대학시절 3선 개헌과 유신독재에 맞서 가열차게 싸웠던 그는 군인이 대통령인 시절을 지나 대통령이 된 그 군인의 딸에게 목숨을 잃은 셈이 되었다. 그를 죽음으로 몬 범인(犯人)을 대통령으로 둔 나 같은 범인(凡人)은 알지 못하는 기막힌 삶을 그는 살아온 것이다.

그의 삶 가운데 특히 감명 깊었던 부분은, 그가 유신독재에 이어 5'18 광주민중항쟁의 유공자로도 선정됐지만 "살아남은 자는 말이 없다"며 스스로 보상을 거부하고 농민운동에 뛰어들어 고사 지경에 이른 우리 밀을 살리기 위해 애썼다는 점이다. 그는 우리 밀 종자를 찾아 전국을 다니며 씨앗들을 모았고, 2년간 모은 종자 24㎏을 각 지역으로 보내 우리 밀 농사를 독려했다. 현재 그의 고향은 전국 우리 밀 생산량의 50%를 차지한다고 한다.

설혹 그날 그가 참석한 집회가 불법이었다 한들 그것이 그를 죽여도 되는 이유 따위는 될 수 없다. 공약을 어긴 것은 대통령이다. 이 땅의 민주주의와 농사를 지키기 위해 평생을 바친 그를,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귀하디 귀한 농민들을 가혹하게 사지로 몰아붙이는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저 유명한 이성복 시인의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에 실려 있는 '그날'의 마지막 시구(詩句)처럼,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은" 이 시절이 너무 참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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