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 이어 폭우·강풍 온 경주
"지진으로 지붕이 내려앉더니 이번에는 태풍이네요. 이게 무슨 난리입니까."
역대급 강풍과 폭우를 동반한 제18호 태풍 '차바'가 경북 동해안을 강타해 경주, 포항을 중심으로 피해가 속출했다. 갑자기 불어난 물로 차량 수십 대가 물에 잠기고, 마을 주민들이 긴급 대피했다. 또 산사태와 도로, 제방, 농경지 유실이 잇따르는 등 포항과 경주 곳곳이 쑥대밭이 됐다.
◆엎친 데 덮쳐버린 경주
9'12 강진의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차바'가 경주를 휘젓고 갔다. 이날 경주에는 토함산 278.0㎜, 감포 223.5㎜, 외동 221㎜ 등 마치 하늘에 구멍이 나기라도 한 듯 비가 쏟아졌다.
야속한 태풍은 지진 직격탄을 맞았던 황남동 한옥마을과 진앙인 내남면 주민에게 다시 한 번 상처를 줬다. 지진으로 기와가 내려앉아 천막으로 지붕을 덮은 황남동 한옥 10여 채 모두 이날 오전 강풍에 천막이 날아가 버렸다. 그나마 있던 일부 기와도 물을 먹어 황토가 줄줄 흘러내렸다. 기와지붕과 금이 간 벽 틈으로 물이 스며들어 방 안과 거실을 온통 물바다로 만들었다.
황남동 주민 황모(75) 씨는 "바람만 없었어도 그럭저럭 비는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이제는 지붕이 완전히 물을 먹어 버려 복구 엄두도 안 난다"고 했다.
진앙인 내남면 일대는 침수 피해를 봤다. 내남면 이조리~덕천리 고속도로 지하도가 이날 내린 폭우로 완전히 침수됐다. 부지 1, 2리 마을 입구도 한때 침수 사태를 빚었다.
박주식 내남면장은 "천둥소리가 지진 날 때 소리와 비슷해 또 지진인 줄 알고 심장이 오그라들었다"며 "내남면은 지진으로 가뜩이나 힘든데 인근 고속도로 확장공사 탓에 배수로가 막혀 침수 피해를 키웠다"고 했다.
이번 태풍으로 농경지, 공단 등지에서도 피해가 잇따랐다. 감포읍 소하천이 넘쳐 인근 농경지가 물에 잠겼고, 외동 동천도 범람해 인근 공단이 침수됐다. 양남면에서는 관성천 물이 넘치면서 인근 주민이 마을회관으로 대피해야 했다. 수렴천은 제방이 유실돼 저지대 마을 일부가 침수됐다. 양북면 어일리는 마을 전체에 물이 들어찼다. 불국동 안길과 황성동 유림 지하도도 물에 잠겼다.
갑자기 불어난 강물에 경주시외버스터미널 인근 서천 둔치 주차장에 있던 차량 60대도 물에 잠겼다. 거센 물살에 일부 차는 뒤집혔고 일부는 수십m를 떠내려갔다.
경주시 관계자는 "태풍에 대비해 서천 둔치에 세워둔 차를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차주에게 연락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은 차주가 많았다"고 했다.
산사태와 도로 유실도 속출했다. 감포'오류리 등의 도로가 유실되거나 침수됐다. 양남에서 월성원자력발전소를 지나 감포로 향하는 31번 국도가 물에 잠기기도 했다. 외동읍과 내남면을 연결하는 도로와 보덕동 추령터널 쪽에서는 산사태가 발생해 응급복구를 했다. 양북면의 봉길터널 입구는 토사가 새 나와 통행이 금지됐다. 경찰은 이날 오전 경주 4곳의 도로 통행을 막았다가 오후 들어 일부 도로 통행을 재개했다.
포항국토관리사무소 관계자는 "산사태로 터널 양쪽이 현재 통행이 불가능하다. 물을 잔뜩 먹은 토사로 복구가 쉽지 않다. 언제 복구될지 답할 수 없는 상태"라고 말했다.
◆순식간에 물바다 된 포항
태풍 '차바'가 할퀴고 간 포항은 눈 깜짝할 사이에 아수라장이 됐다.
5일 오전 5시쯤 포항에 태풍주의보가 발효될 때까지만 해도 시민들은 이 정도까지 억수 같은 비가 내릴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오전 8시쯤 출근길에 나선 시민들은 '설마 포항에 큰비가 오기야 하겠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전 9시쯤 하늘에 구멍이 난 듯 내리는 강한 비와 가만히 서 있기 힘들 정도의 강풍이 포항을 덮치면서 시민들은 곧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이 시각 비는 시간당 30.5㎜, 바람은 초속 16.1m로 세차게 불었다. 잠깐 차에서 내려 건물로 들어가던 시민들은 10초도 되지 않는 짧은 순간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빗물에 홀딱 젖었고, 우산은 펴는 순간 뒤집히면서 휘어져 무용지물이 됐다.
앞도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비바람이 오후 1시까지 계속됐다. 마치 비가 바람을 타고 뱀처럼 움직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시내 쪽에선 도로 곳곳이 물에 잠기면서 옆 차로 차량이 지나갈 때마다 앞유리창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막이 됐다. 차량을 멈췄다가 엔진으로 물이 들어올까 봐 차를 멈추지도 못해 운전자들은 진땀을 뺐다. 김모(32) 씨는 "포항에 이렇게 비가 많이 올 줄 생각도 못 했다"며 넋 나간 표정으로 내리는 비를 지켜봤다.
저지대 주민들이 설마 설마 했던 침수도 현실로 닥쳤다. 오전 8시쯤부터 가게에 나와 태풍 상황을 지켜보던 남구 효자동 효자시장 일대 상가 상인들은 순식간에 차오르는 물에 황급히 문을 닫고 문틈 사이로 걸레 등을 끼워 넣어 봤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성인 골반까지 차오른 물은 폭포수같이 가게로 밀려들어 와 상품을 덮쳤다. 상품을 물에 젖지 않도록 선반 위로 올리던 상인들은 무섭게 차오르는 물을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이곳을 지나는 차량들은 물에 반쯤 잠겨 떠다니는 듯 보였다. 임시가동된 효자동 빗물펌프장도 몰려드는 빗물을 막지 못했다. 상인 최모(44'여) 씨는 "삽시간에 물이 차올라 대책도 세우지 못하고 당했다"며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북구 장성동 빗물펌프장 주변 주택'상가지역도 무서울 정도로 퍼붓는 비에 속절없이 당했다. 오전 11시쯤 시간당 47.6㎜의 물 폭탄이 터지자 이곳 일대에서 '살려달라'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밤 근무를 하고 집에 돌아와 잠을 자던 청년 둘은 바닥이 축축해 정신을 차려보니 집에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고 했다. 119구조대가 1층 방범창을 잘라내 이들을 구조했지만, 이들의 놀란 가슴과 상기된 낯빛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집 밖으로 몰려나온 주민들은 턱없이 부족한 빗물 펌프 장비 동원에 불만을 쏟아내기도 했다. 천모(24) 씨는 "정신을 차려보니 거실 등이 모두 잠겨 있었고, 냉장고와 소파가 물에 떠다녔다"며 "빠져나오려 했지만 길이 막혀 창가 쪽에 붙어 살려달라고 외쳤다. 정말 무서운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남구 냉천 주변에 차량을 주차했던 차주들도 낭패를 봤다. 포항시는 차량을 인양하려고 애를 썼지만 이미 침수 피해를 본 뒤였다. 뒤늦게 자신의 차량을 찾으러 온 차주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발만 동동 굴렀다.
이날 태풍은 오후 3시쯤 울산 동북동 쪽으로 빠져나가기까지 모두 155.3㎜의 비를 포항에 퍼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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