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 브랜드 이용? 브랜드가 예술 활용?…『브랜드와 아티스트, 공생의 법칙』

입력 2016-10-01 04:55:05

브랜드와 아티스트, 공생의 법칙/ 제랄딘 미셜 외 지음/ 배영란 옮김/ 예경 펴냄

예술 소재로 각광받고 있는 브랜드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소비사회의 상징인 브랜드를 예술가(아티스트)들이 어떻게 장악했는지 보여준다. 신기한 일이다. 통념상 브랜드는 상품과 서비스의 더욱 많은 판매를 위해 활용되는 촉매인 반면, 예술가는 그런 경제 논리에 크게 집착하지 않는 부류로 알려져 있다.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아 보이는 두 존재가 지금 부지런히 만나고 있다니 말이다.

예술가들은 브랜드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며 미감(美感)을 발견하고 있다. 과거에 존재하던 소재를 전혀 다르게 사용하고,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기존 예술의 형식들을 자유롭고 장식적이며 반역사적으로 인용한다.

미술가 앤디 워홀(1928~1987)과 그가 창시한 '팝 아트'가 대표적인 예다. 지금도 유효한 여러 시선이 담겨 있다. 가령 하나의 브랜드에 불과했던 켐벨 수프 통조림은 앤디 워홀에 의해 예술 작품의 소재로 지위가 격상됐다. 대량 소비 상품에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평범한 일상을 미화하고 대중문화를 예술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이다. 그러면서 앤디 워홀은 규격화된 대량 소비시장에 대해 비판적 시각도 제시하는 한편, 대량 소비시장이 된 예술계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했다. 하나의 예술 담론이 탄생한 것이다.

그런데 팝 아트 이전에도 브랜드는 작품 속에 등장했다. 화가 에두아르 마네(1832~1883)의 그림 '폴리 베르제르 술집'을 살펴보자. 여종업원 옆에 영국 맥주 '바스'가 놓여 있다. 마네는 바스사(社)로부터 광고비를 받고 요즘 영화나 드라마 속 PPL(제품 배치 마케팅) 같은 제품 광고를 작품에다 넣은 것일까? 아니다. 마네는 자신이 묘사하는 장면에 사실성을 부여하기 위해 바스 브랜드 로고가 박힌 오브제를 쓴 것이다. 서민들이 즐겨 마시는 바스 맥주 옆에는 부유층이 즐겨 마시는 샴페인도 놓여 있다.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프랑스 파리의 이 유명한 술집에 모여들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바스 맥주는 이 작품은 물론 화가 피카소와 브라크의 작품에도 등장한다. 특히 피카소의 경우 작품 제목에 '바스'라는 브랜드를 집어넣기도 했다. 여기까지 예술 작품이 브랜드를 이용한 것이라면, 이제는 브랜드가 예술 작품을 활용한다. 바스사는 브랜드 마케팅에 이들 화가들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자사 브랜드를 '예술적 가치를 마시는 브랜드'로 홍보하고 있다.

다시 예술가들의 입장으로 돌아가 보자. 마네가 바스 맥주로 작품의 사실성을 높인 것에서 나아가, 이후의 예술가들은 브랜드의 도움을 받아 작품의 주제를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하고자 했다. 영화 '부시맨'(1980)에 등장하는 코카콜라가 좋은 예다. 부시맨 부족 앞에 느닷없이 코카콜라 병 하나가 나타나 벌어지는 해프닝을 그리는 이 영화에서 코카콜라는 자본주의와 서구 소비사회에 대한 비판의 메시지를 전한다. 코카콜라 없이 이 영화는 시작할 수도 마무리될 수도 메시지를 던질 수도 없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코카콜라는 이 영화의 흥행 덕분에 엄청난 홍보 효과를 얻었다. 사실 다른 여러 사례를 살펴봐도 예술가와 브랜드가 만나면 꽤 '윈윈'(win-win)한다. 지금 세계의 수많은 기업의 브랜드가 여러 예술 작품에, 특히 영화 같은 영상물에 자사의 브랜드 로고를 노출시키려고 애쓰게 된 까닭이다. 부시맨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그 브랜드를 찬미하든 비난하든 상관은 없어 보인다. 가령 재난 영화에서 악당이 자동차를 타더라도, 그 자동차가 처참하게 파괴되더라도, 차 보닛에 부착된 브랜드 로고만 보여줄 수 있다면 그만인 셈이다. 물론 일부 기업은 자사의 브랜드를 마음대로 쓴 예술가를 법정으로 불러들이기도 한다.

기업들은 이쯤에서 사고를 멈추지만, 예술가들은 브랜드를 더욱 창조적으로 다루기 위해 애쓰고 있다. 브랜드를 매개로 예술가들은 우리에게 다른 시각, 새로운 시각, 그러니까 가치 있는 시각을 계속 제안하고 있다. 이 책은 1865년부터 2015년까지 150년 동안 다양한 예술 영역에서 브랜드를 가지고 논 예술가 35명과 그들의 작품 세계를 분석했다. ▷그저 재미로 브랜드를 작품에 쓰거나 ▷좀 더 나아가 브랜드의 변형 및 왜곡에 집중하거나 ▷브랜드로 작품 속 인물의 성격을 나타내거나 ▷아예 브랜드에 인격을 부여해 메시지를 던지거나 ▷장소, 시대, 집단 등 현실 지표를 브랜드로 설명하거나 ▷브랜드가 지닌 향수와 감정 유발 코드를 차용하거나. 이제 브랜드라는 소재 없이 예술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됐다. 286쪽, 1만9천원.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