춥고 배고파, 그리고 자고 싶어
춥고 배고파. 그리고 남자와 자고 싶어….
(박상우, 부분)
취기(醉氣)와 외로움에 지친 그녀는 타들어가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어. 내 가슴도 한편에서 타들어가고 있었어. 그랬어. 그녀의 음성은 온통 지친 그리움과 외로움으로 가득 차 있었어. 그녀는 정말 추웠던 거야. 정말 배고팠던 거야. 어찌 그것이 육신의 추위와 배고픔만이겠니? 그녀는 지나간 시절의 그리움으로 인한 추위와 배고픔에 몸부림치고 있었던 거야. 그녀의 추위와 배고픔은 실상 우리들의 몫이기도 했어.
우리 여섯은 눈이 온다는 핑계로, 한 연대를 보낸다는 핑계로 만났어. 1980년대, 그 열정의 시대에 우린 모두 서로 손을 굳게 잡고 살았어. 그 손을 놓으면 세상이 무너진다고, 손을 잡고 있으면 무너진 세상을 다시 세울 수 있다고, 그 잡은 손이 영원히 서로를 잡고 있으리라 믿었어. 그래. 그 시절은 그런 시절이었어. 우린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었던 거야. 하지만 그리움이 현실이 될 수 없는 건 이미 그리움의 대상이 부재하기 때문일 거야. 민족이니, 민주니, 자유니, 통일이니 하는 우리들의 이데올로기는 저만치 날아가고 우리들 앞에는 찌들어버린 현실들이 가로막고 있었어.
그땐 그랬어. 이 세상 모든 것이 쓰레기 같은 잡동사니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했었지. 우리들이 지닌 열정만이 그 잡동사니를 정리하고 아름다운 시대를 이끌 수 있다고 생각했지. 우리들이 나누던 대화는 항상 열기에 휩싸여 있었고 그 열기 속에서 빠져나온다면 어떤 것도 남지 않을 거라 믿었지. 그것을 위해 내 육신이 재가 되어버린다고 하더라도 괜찮았지. 하지만 이미 그 시대는 그 시대를 산 우리들의 몫일 뿐이었어. 인간은 신일 수 없었던 거야. 인간은 말 그대로 인간, 그건 다른 여타 짐승들과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던 거야. 민족이니 통일이니 하는 소위 정치적인 이야기는 퇴색하고 증권, 부동산, 포커, 고스톱, 방중술, 포르노만이 남아 우리들의 대화를 차지하고 있었어. 죽어버린 꿈들만이 거기에서 숨을 쉬고 있었던 거야. 하지만 돌아보면 우리들의 일상이기도 했어. 냉소? 그래. 그렇게 시니컬한 목소리들만이 거리에 가득 차고 있었어. 꿈의 소멸, 그건 슬픈 일이었어.
우린 어제를 기억하려 하지 않았어. 남아있는 건 어제의 열정을 수치스러워하는 우리들만 남아있었어. 물론 오늘을 통해 내일을 보려 하지도 않았어. 그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이미 알았기 때문이었어. 이미 세상의 모습이 우리가 꿈꾼 것과는 엄청난 괴리를 지니면서 저만치 달려가고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어. 우리는 공을 잡으러 달려가고 있는데 공은 이미 하늘 높이 날아가고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어. 궁극적으로 이미 우린 '우리'가 아니었어. 우리 가슴에 남겨진 건 극단적인 허무뿐이고 그 허무 속에서 끝끝내 찾고 싶은 건 인간적인 낭만뿐이었어. 인간적인 낭만, 위대한 열정이 아니고 그 값싸디 값싼 낭만 말이야.(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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