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와 울림] 한국에 대한 나의 첫인상

입력 2016-09-23 04:55:01

영국 케임브리지대(영문학 학사)
영국 케임브리지대(영문학 학사)'연세대(한국학 석사)'영국 옥스퍼드대(한국사 박사) 졸업, 전 독일 베를린 훔볼트대 초빙교수

저녁 공기 사이로 지독한 거름 냄새

국가 울리자 국기 경례 "모두 애국자"

한복차림 귀성객 종이에 앉은 모습

상황 적응 뛰어난 민족 특성 보여줘

내가 한국에 첫발을 디딘 것은, 지금으로부터 30년도 훨씬 전인 1982년 가을이었다. 지금이야 런던에서 인천까지 항공 노선이 개설되어 11시간 정도면 도착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영국에서 한국까지 곧장 올 수 있는 직항 노선이 없었다. 그래서 먼저 파리로 가서 다시 비행기를 타고 알래스카 앵커리지를 거쳐야, 한국으로 올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김포공항이 유일한 국제공항이었으며 비행시간도 자그마치 18시간이나 걸렸다. 그 긴 여정이 나의 첫 번째 한국 방문이자 첫 비행이었으며 유럽을 벗어난 첫 여행이었다.

대한항공 보잉 747기를 타고 김포공항에 도착했을 때의 느낌은 참 기묘했다. 한국과 인연이 있어서 그랬을까, 유리창 너머 산으로 둘러싸인 풍경을 보면서 마치 오랫동안 잊고 있던 고향으로 돌아온 듯한 기분이었다. 공항을 벗어나자 선홍빛 해가 지고 있는데 따뜻한 저녁 공기 사이로 멀리서 지독한 거름 냄새가 풍겨 왔다. 그 낯선 냄새에 "와! 드디어 내가 동아시아에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스피커에서 한국 국가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빨리빨리"라고 외치며 버스에 승객들의 짐을 싣던 사람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몸을 꼿꼿이 세워 가슴에 손을 올리는 것이었다. 그걸 보면서 "와! 한국 사람들은 모두 애국자구나!"라는 생각을 했고 이것이 한국에 대한 나의 두 번째 생각이었다.

1982년 그 짧은 열흘간 여행에서의 몇몇 기억들은 아직도 내 가슴 속에 또렷하다. 그중 하나는 어떤 나이 많은 사과 장수가 길거리에서 사과를 팔고 있던 장면이다. 나는 그때까지 그렇게 많이 쌓여 있는 사과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은 그 사과 장수는 밤이 되어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사과 더미 옆에서 잠을 자고 그다음 날 계속 장사를 하는 것이었다.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그때 알았다. 또 하나 잊히지 않는 장면은 너무도 아름다운 색상의 우아한 한복을 차려입은 여인들이 서울역에 종이를 깔고 앉아 있던 모습이었다. 그때가 마침 추석이었고 그 사람들은 고향에 가기 위해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아름다운 드레스를 더럽히는 일을 영국인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테지만 그 한국 여인들은 너무나 태연하게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상황에 대한 이런 뛰어난 적응력은 한국 사람들의 대표적인 민족적 특성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시골 버스를 탔을 때의 일도 결코 잊을 수 없다. 버스를 탄 후 막 자리에 앉았을 때, 내 좌석 아래에 놓여 있던 보따리가 꿀꿀 소리를 내며 움직인다는 것을 알았다. 그 보따리에서는 고약한 냄새까지 나고 있었다. 그때, 한국에서는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적어도 시골에서는 어떠한 규칙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심지어 살아 있는 새끼 돼지를 운반하는 데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그런데 그것이 신기하게도 재미있게 느껴졌다. 버스 여행에서의 또 다른 인상적인 기억은 승객들의 흥겨운 춤사위다. 여정이 좀 길다 싶으면 버스 안 통로에서 몇몇 승객들이 흥에 겨워 춤을 추기도 한다. 이날 이후 이런 장면을 여러 차례 목격했는데 요즘은 안타깝게도 안전상의 문제로 인해 사라져 버린 풍경이다.

순박하고 친절한 사람들과 아름다운 시골 경치, 다음 식사 때까지 배가 든든한 푸짐한 음식과 큼직하고 단맛이 풍부한 과일들…. 짧은 한국 방문이 끝났을 때는 너무나 아쉬웠고 미련이 남았었다. 그때는 한국을 다시 방문하게 될 줄 몰랐기에 아쉬움을 달래며 한국을 떠났다. 그러나 그로부터 5년 뒤 1987년에는 한국에서 좀 더 오래 머물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그리고 2001년부터 지금까지 나는 한국에서 살고 있다.

앞으로 한 달에 한 번씩 매일신문 독자 여러분께 내가 한국살이를 하면서 겪은 이야기를 전해 드릴 것이다. 내 소중한 경험을 나눌 생각에 설레고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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