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를 거행할 때 가장 정성들여 준비해야 할 것 중에 하나가 강론(성경에 대한 해석)이다. 하지만 때론 이해하기 힘든 말씀을 마주할 때는 상당히 곤혹스러워진다. 얼마 전에도 이런 성경 말씀 때문에 한참 동안 고민을 한 적이 있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인간적인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제대로 된 양치기라면 어떻게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버려둔 채 한 마리를 찾아 나설 수 있는가? 아흔아홉 마리의 안전은 어떻게 되는가? 좀처럼 예수의 시각과 나의 시각을 좁힐 수 없었다.
몇 년 전 이스라엘 순례를 갔을 때 실제로 양치기 베두인족을 본 적이 있다. 이스라엘 광야는 사막과 비슷하지만 겨울에 비가 오기 때문에 우기가 되면 광야에 물길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그 물길이 강처럼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때마다 다르게 형성된다. 당연히 물기를 머금고 있는 곳에 풀이 자라니까 양치기들은 어디에 물길이 이루어지는지 경험적으로 잘 알아야 한다. 또 양들이 한 곳에서 풀을 다 뜯어 먹으면 또 다른 풀밭으로 이동해야 한다. 그런데 그 길은 가까울 수도 있고 반나절이 걸릴 수도 있고 며칠이 걸릴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양이 풀을 뜯어먹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양치기에 의존해야만 한다. 만일 양들이 양치기가 이끄는 곳을 벗어나 제 마음대로 대열을 떠나 버리면 다른 동물들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가 된다. 풀밭을 찾지 못하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길 잃고 헤매는 양은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절박한 하나의 생명이고, 그 막다른 골목에 이른 한 마리의 양을 살리기 위해 양치기가 나선다는 이야기이다.
한참을 생각하다 보니 예수의 시각으로 바라볼 눈이 조금씩 뜨여졌다. 시각의 차이는 100이라는 숫자의 유혹이었다. 99/100의 안전한 양과 1/100의 길 잃은 양이라는 산술적인 허상에 빠진 것이다. 있는 것은 99/100이 아니라 99/99이고 1/100이 아니라 1/1 뿐이다. 결국 모두 하나이고 그 하나가 전부인 것이다.
스필버그 감독의 라는 유명한 실화 영화가 있다.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쉰들러는 나치에 협력해 많은 돈을 번 뒤, 전쟁이 끝날 무렵 폴란드 군수공장에서 일하는 1천200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을 전 재산을 바쳐 나치로부터 구해낸다. 하지만 전쟁 후 쉰들러는 나치에 협력한 전범으로 몰릴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때 구출된 유대인들은 모두의 서명이 담긴 진정서를 작성해서 쉰들러의 목숨을 구명하고 또 자신들의 금이빨을 뽑아서 반지를 만들어 전하는데 거기에는 탈무드에 나오는 하나의 문장이 있다.
"한 생명을 구한 자는 온 세상을 구한 것이다.(Whoever saves one life, saves the world entire)"
필자가 사목하는 성당에는 대략 500명의 신자가 주일마다 미사에 나온다. 1/500이 아니라 1/1로 500번 바라보아야 진정한 목자가 된다고 오늘 예수는 나에게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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