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네 글은 빛나는 지평선이었다. 나도 도달하기를 원했지만, 그러기에는 내가 받은 교육의 중력이 납처럼 무거워 결코 이르지 못할 지평선."
깡총깡총은 깡충깡충의 잘못이랍니다. 몇 해 전 딸아이 대입적성고사 1번 문제였습니다. 1번부터 틀린 딸아이가 말했습니다. "어렸을 때 아빠가 토끼는 깡총깡총, 소는 음매음매, 고양이는 야옹야옹이라매." 할 말을 잃은 저는 혼자서 중얼거립니다. '토끼가 제 적성에 맞게 깡총깡총 뛸 수도 있고 깡충깡충 뛸 수도 있지. 고양이가 냐옹냐옹 울 수도 있고 야옹야옹 울 수도 있지. 제 적성에 맞게.' 교육의 중력은 적성을 이렇게 억압하고 맙니다.
적성(適性)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일에 알맞은 성질이나 소질'을 말합니다. 적성은 일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 아니고 자신에게 일을 맞추는 것입니다. 가령 어떤 학생이 시 창작에 관심이 있어서 문예창작학과를 지망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적성고사의 과목으로 국어 영어 수학이 4지선다형으로 출제된다면 그 학생의 재능과 적성을 바르게 평가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적성은 공중을 떠다니는 상상력으로 가득 차 있는데, 메르시어의 말처럼 교육의 중력이 납처럼 무거워서 상상력의 발목을 땅으로 자꾸 끌어내린다면, 그 교육이 바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참된 지성은 오히려 교육의 중력에 저항합니다.
저는 시를 잘 못 쓰지만, 시를 쓰기 위해서는 우선 사물을 깊게 들여다봐야 합니다. 시(視)가 그냥 바라보는 것이라면, 관(觀)은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고, 찰(察)은 더욱 세밀하게 사물의 내면까지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시(詩)는 시(視)에서 시작해서 관(觀)과 찰(察)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자기의 감정을 세계에 실어 보내는 것이 시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야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세계가 불러주는 말을 받아 적는 것이 오히려 시의 적성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시는 '받아쓰기'입니다. 세계를 열심히 바라보다 보면 실재와 환상의 경계에서 시는 태어납니다. 토끼는 깡충깡충 뛰겠다고 작정하고 뛰지 않습니다. 토끼의 '무의식적 뛰기'가 토끼의 적성을 잘 살린 뛰기가 됩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는 말이 지성에 의지하는 말이라면, '모르는 것이 약이다'는 말은 환상과 무의식을 옹호하는 말입니다. 적성을 찾아가는 길은 환상과 무의식이 안내할지도 모릅니다.
다시 깡충깡충에 대해 생각합니다. 교육이 해야 할 일은 깡충깡충을 깡총깡총으로도 뛸 수 있게 토끼의 풀밭을 마음껏 허용하는 일입니다. 그 자유로운 상상력의 풀밭에서 토끼의 적성은 태어납니다. 적성은 모르는 곳, 오직 모르는 곳에서 찾아집니다. 가을 저녁의 노을이 어디로 번지겠다고 작정하고 번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로 번지는지 몰라서 노을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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