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을 잃은 노인이 총을 들었다
77세의 연기자 박근형은 현재 57년째 배우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1970, 80년대에 드라마에서 이정길과 함께 미남 배우 투톱으로 활약했다. 강한 인상과 카리스마 있는 연기 스타일로 기업인이나 정치인 역할을 주로 해왔고, 팬들의 기억에도 드라마 '추적자'의 비리로 뭉친 기업 총수처럼 압도적인 인상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TV 예능프로그램 '꽃보다 할배'에서 서정적이고 로맨틱한 면모를 많이 보여주면서 순정을 간직한 '로맨스그레이' 역할로 새로운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어쨌든 박근형은 50년 이상 실력파 톱 연기자 자리를 꾸준히 유지해왔으며, 지금도 이순재와 함께 노인 배우 투톱의 위치를 당당히 지키고 있다. 그는 강렬한 카리스마 연기와 찌질대는 서민 연기, 선한 역과 악한 역을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는 진정한 대배우다.
노인을 다루는 영화는 드물지 않게 제작된다. '그대를 사랑합니다' '워낭소리' '장수상회'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등 픽션과 다큐멘터리에서 노인은 겉으로는 꼬장꼬장하지만 지혜를 간직한 인물로 그려진다. '그랜드파더'는 이러한 전형화된 노인 재현을 뒤집는다. 노인 누아르 액션영화인 '그랜드파더'의 주인공 박기광 노인은 베트남전에 참전한 용사이며, 마을버스 운전으로 간신히 생활하고 있으며, 때때로 어버이연합 집회에 참석하여 '빨갱이'를 혼내준다. 고엽제의 고통을 술로 이기려하고 가족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바람에 진작 그의 가족들은 그를 등졌다.
군복과 군화, 어버이연합, 폭력과 고성, 가스통, 편견과 관용 없음을 생존의 무기처럼 가지고 살고 있는 박기광 노인은 온갖 갈등으로 점철된 한국사회의 대표 노인을 상징하는 존재로 보인다. 이런 그에게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아들의 자살 소식이 들려오고, 그는 장례식장에서 낯선 손녀 보람(고보결)을 만나 며칠간 함께 지내게 된다. 그는 할아버지를 얼음처럼 차갑게 대하는 손녀를 위해 아들이 자살로 죽은 게 아님을 직감하고 이를 스스로 밝혀내려고 작정한다. 경찰에게 아무리 조사를 요청해봤자 권력 없는 노인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회이니, 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 모든 것을 파헤치겠다고 선언한다. 노인은 장도리를 들고, 총을 들고, 가스통을 들었다.
박 노인이 가진 것은 슬픔을 넘어선 분노, 자신과 가족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사회, 그리고 돈이 되면 불법이건 불의이건 어느 것도 마다치 않는 악당들에 대한 적개심이다. 힘이 달리고 고통이 온 육체를 엄습해오지만, 그는 주저하지 않고 매달린다. 박 노인은 결정적인 단서를 얻고 난 후 목숨을 건 사투를 통해 손녀를 지키고자 한다.
이 영화는 '부산행'이나 '터널'처럼 특별한 사건을 통해 사회의 부조리함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사회물이다. 하지만 영화에는 유머가 실릴 틈이 없을 정도로 슬픔이 가득하고 비장하다.
어쩌면 이야기가 진부하게 느껴지고 결말이 예측되기도 한다. 아들의 친구인 줄로 알았던 이가 실은 악당이라는 사실과 끝까지 반성할 줄 모르는 무심한 경찰의 존재는 새로울 것이 없다. 부자는 나쁘고 가난한 이는 비참하거나, 선과 악의 구도가 뚜렷하게 나뉘어 이야기에 역동성을 창출해내지 못한다. 게다가 다소 느슨하게 이어지는 편집과 생동감이 살아있지 못한 연출로 인해 극적 긴장감이 때때로 떨어지고 리듬감을 해치는 문제가 있다.
눈에 띄는 단점이 있지만, 노인 캐릭터를 이 정도로 생생하게 그려낸 영화가 있을까. 우리는 인자하거나 무뚝뚝하거나 고집스러운 노인으로 그려지는 보조적 캐릭터들을 익히 봐왔다. 그러나 이 영화는 늘 타자로 밀려나 있던 노인을 주인공으로 세우고, 거기에 박근형이라는 대배우의 숨결이 들어가 피와 살이 숨 쉬는 늙은 영웅을 만들어냈다. 우리에게도 '테이큰'의 리암 니슨이나 '그랜토리노'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같은, 심장을 파고드는 노영웅이 생겼다. 혹은 더 이상 더러운 도시를 보고 살 수가 없어 목숨을 걸고 대청소를 하겠다고 결심하는 안티영웅으로서의 모습은 '택시 드라이버'의 로버트 드 니로를 떠올리게 한다. 말이 안 통하는 노인네가 아니라 질곡의 삶을 살아낸 위대한 한 개인으로, 부모와 주변의 어르신을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솟아난다. 거칠지만 의미 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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