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가 품은 인물 꽃으로 피다]<5>성리학을 꽃피운 대학자 김종직

입력 2016-08-30 04:55:05

不事二君 지킨 부친에 조의제문 올려…연산군 때 부관참시 당해

조선 성리학의 씨를 뿌린 대학자 김종직은 아버지 김숙자로부터 성리학을 이어받았다. 아버지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성리 도덕으로 학문과 인격을 닦아 인륜의 기강을 바로잡으려 했다. 또한, 민본의 의리와 고유의 역사 풍토에 근거하여 문명사회의 이상 실현을 추구하였다. 인간의 심성에서부터 우주의 운행에 이르기까지 사물의 이치를 해명하는 정연한 논리 체계를 수립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개인의 수양과 인간관계는 물론 사회 국가 운영에까지 도덕에 합당한 사회 이상을 구현하려 했다. 그 정신은 한훤당 김굉필에게 이어져 정암 조광조와 신당 정붕에게, 신당은 송당 박영에게, 송당은 진락당 김취성과 용암 박운에게 성리학을 전수했으며 영남사림의 종사로 성리학의 꽃을 피웠다. 그의 제자들이 도학 정치를 실현하려고 했던 것은 궁극적으로 정의를 숭상하고 의리가 앞서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스승이면서 아버지인 김숙자의 죽음

남녘 먼 땅으로부터 불어오는 훈풍이 보리 이랑을 흔들었다. 대지를 깨우는 바람 소리에 겨우내 웅크린 생명이 서서히 기지개를 켜더니 뒷동산 진달래는 붉은 꽃물 머금고 수줍게 웃고 있었다. 까투리 한 마리 봄꽃에 취한 듯 비틀거리던 그해 봄은 종직의 인생에도 봄날이었다. 김천에 살던 울진 현령 조계문의 딸과 혼례를 올렸다. 이어서 1453년(단종 1년) 진사시에 응시, 당당히 급제했다. 다만 걱정인 것은 부쩍 여윈 아버지의 건강이었다.

"나는 선왕에 대한 '불사이군'의 뜻을 지키기 위해 벼슬을 버렸지만, 너희들은 이 나라를 위해 벼슬길에 올라야 한다."

병색이 짙은 아버지의 목소리는 마중물에 겨우 딸려 올라오는 우물처럼 버겁게 들렸다. 성리학의 기본이 되는 소학은 물론 가례를 통해 가정의 예절 규범을 배웠거늘 병환 중인 아버지를 두고 과거 길에 오를 수 없었다.

"아비 곁을 지키는 것만이 가례의 실천이 아니니라. 아비가 바라는 것을 이루어 내는 것 또한 아비에 대한 효이니라."

아버지 숙자는 아들의 과거 길을 재촉했다. 1456년(세조 2년) 김종직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복시에 나서게 되었으나 낙방했다. 그해 3월 학문의 스승이었던 아버지를 애통한 마음으로 떠나보내야 했다.

김종직(金宗直)은 1431년(세종 13년)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제대리 한골마을의 외가에서 강호 김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이자 사상가이며, 성리학자, 정치가, 교육자, 시인이다. 자(字)는 계온(季溫), 호는 점필재(?畢齋),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일선(一善)으로 고려개국 벽상공신 순충공 김선궁이 시조이다.

◆무오사화의 원인이 된 조의제문을 짓다

1457년(세조 3년) 아버지의 시묘살이를 하는 동안 김종직은 잠시 경산을 다녀올 일이 생겼다. 가는 길에 날이 어두워져 '답계역관'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별빛마저 잠든 밤에 객지에 홀로 누우니 차가운 땅 아래에 잠들어 계신 아버지 생각이 더욱 간절했다.

'불사이군'을 강조하시던 아버지는 부도덕한 방법으로 왕권을 찬탈한 수양대군을 왕으로 섬기지 않았다. 그에 반해 자신은 그 아래에 엎드려 벼슬을 해야 했다. 아들을 안타까이 여기실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위로해 드리고 싶었을까?

그는 중국 진나라 때 항우가 초나라의 의제를 폐한 일을 떠올리며 묘안을 짜내었다. 서초패왕 항우에게 시해되어 침강에 던져졌던 초나라 의제(義帝)가 꿈에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해 왔다는 핑계를 들어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조상(弔喪)하는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었다. 난해한 문장으로 당대의 식자층도 이해하지 못하도록 교묘히 풍자했다. 이는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단종을 비유한 것으로 세조의 찬탈을 비난한 속마음이 숨겨진 글이었다. 조의제문은 훗날 성종실록의 편찬 과정에서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 등에 의해 사초에 올려지고 이는 후일 무오사화의 원인이 된다.

세조는 공신 세력을 견제할 목적으로 새로운 인사들의 등용 정책을 추진했다. 고려말의 정몽주, 길재 등의 학풍을 잇는 이들은 스스로 도학적 실천을 구현하려는 사회 정책에 대한 전반적인 개혁을 요구했다. 김종직이 대표적인 인물로 떠오르게 되었다.

1459년(세조 5년) 문과에 급제한 김종직은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로 벼슬길에 올랐다. 이어서 저작'박사'승문원교검'사헌부감찰 등을 두루 지내면서 왕명에 따라 세자빈한씨애책문(世子嬪韓氏哀冊文)'인수왕후봉숭왕책문(仁壽王后封崇王冊文) 등을 지어 세조 임금의 신임을 얻었다.

세조는 성리학만 고집하는 유생들의 사고가 편협하다 여겼다. 그리하여 유생들에게 천문과 지리, 음양과 유려, 약학, 복식 시사 등 여러 분야에 두루 관심을 두도록 하였다. 이에 종직은 시사를 제외한 나머지는 역관이나 지관, 의원, 형리들이나 배워야 할 잡학(雜學)인데 문신에게 힘써 배워 능통하게 하라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라며 반대했다. 그 일로 세조의 눈 밖에 난 종직은 관직을 박탈당했다. 그로 인해 낙향하여 후학을 가르치다가 영남병마평사의 직위에 올랐다.

◆지방관으로 선정을 베풀다

그 후 함양군수로 재직하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공물을 대체로 해당 지역 토산물로 바치도록 했다. 나지도 않는 차를 내야 했던 함양 백성들의 고초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백성들은 차가 나는 이웃 고을을 찾아가 쌀 한 말을 주고 차 한 홉을 받아와 바쳐야 했다.

종직은 당나라에서 구해온 차 종자를 지리산 자락에 심었다는 삼국사기의 고사를 생각해 냈다. 지리산 자락에 자연으로 자라고 있는 차나무를 찾아 다원을 조성했다.

그의 학문과 선정이 널리 알려지면서 유생들이 그로부터 학문을 배우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중에는 훗날 길재, 김숙자, 김종직에 이르는 성리학의 학통을 이어받을 김굉필과 정여창이 있었다. 특히 김굉필의 학문은 훗날 조광조에 이어져 영남학파는 절정의 꽃을 피웠다. 그후 통훈대부로 승진하여 승문원 박사로 임명되면서 함양을 떠나게 되었다. 군민들은 선생의 선정을 잊지 못해 생사당을 짓고 매월 참배했다.

1476년(성종 7년) 고향에 계신 어머니의 병환이 깊어 사직을 청했으나 성종은 선대 고향인 선산부사로 임명했다. 밀양에 계시던 노모를 선산으로 모시고 극진히 섬겼다. 이때 함양군수 시절 자신을 따르던 김굉필, 곽승화 등 젊은 제자들이 함께 따라 선산으로 몰려왔다.

선산에서도 선정을 베풀어 노부모를 봉양하고 있는 효자들에게는 부역을 면했다. 틈틈이 향교에 나가 성균관 알성시를 대비한 특강을 열어 여러 명을 급제시켰다. 또한, 부내의 면적과 호구 수, 토지 크기와 도로 등을 파악하여 도지도와 선산지도지를 만들어 공정한 세정을 펼치려 노력했다.

선산지리도 위에 '선산지리도십절'(善山地理圖十絶)을 시로 쓰고 하나하나 해설을 첨부해 놓았다. 바쁘게 지냈던 김종직의 선산 시절은 1479년 모친이 세상을 떠나면서 끝이 났다. 그는 어머니의 시신을 밀양으로 옮겨 장사지내고 시묘살이 3년 후 한양으로 향했다.

◆낙향하여 후학을 가르침

1480년 당시의 조정은 수렴청정에서 벗어난 성종이 유자광을 포함한 공신들과 척신 세력 사이에서 그들을 견제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학문을 숭상하여 도학 정치를 꿈꾸고 있던 성종은 김종직을 불러들였다.

과거에 급제한 신진 유생들은 사림의 거목인 김종직을 스승으로 섬기며 조정 내에 새로운 부류를 형성했다. 그들은 언론권을 장악해 훈구파의 부정부패를 공격했다. 두 세력은 주의와 사상이 현격히 달랐기에 사사건건 대립하였다. 성종의 후원을 입은 사림파는 지방행정 조직을 감시하고 백성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유향소를 부활했다.

1485년(성종 16년) 부인과 사별하고 혼자 된 지 3년이 지났던 김종직은 문극정의 딸을 정부인으로 맞이했다. 결혼 후 주로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등에 재직하면서 서책 편찬을 감수했다. 1490년(성종 21년) 김종직은 지병이 악화, 형조판서 직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고향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일상을 그리는 사생시를 쓰기 시작했다.

권력자들의 횡포로 인해 인간관계의 믿음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비극을 애도하는 글도 많이 남겼다. 김종직의 병이 깊어지자 성종은 사관을 보내 문병하고 탕재를 내렸다. 1492년(성종 23년) 62세의 김종직은 성종의 지극한 마음을 뒤로하고 끝내 죽음을 맞이하였다.

조정에서는 2일 동안 조회를 열지 않고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성종은 문충이라는 시호를 하사하였다. 밀양의 예림서원(藝林書院),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柏淵書院), 김천의 경렴서원(景濂書院), 개령의 덕림서원(德林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부관참시의 극형을 받다

김종직이 세상을 떠난 2년 후 성종에 이어 세자 '융'이 왕위에 오르니 조선의 10대 왕인 연산군이었다. 그는 사냥을 즐기며 학문을 게을리함으로써 도학적 인격을 갖추라는 사림파의 잔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유자광은 김종직이 함양군수 시절, 자신이 쓴 학사루 편액을 불태운 일로 앙심을 품고 있었다. 임금이 사림파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린 유자광은 세조 때에 사초에 올린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문제 삼았다. 종묘사직과도 관련이 있다는 핑계로 사초를 발췌해서 연산군에게 가져갔다.

할아버지인 세조대왕을 능멸하였다는 이유로 연산군은 김종직에게 부관참시의 극형을 내렸다. 그의 수많은 제자가 그 일로 인해 유배되거나 능지처참 형을 받았다. 이때 김종직의 제자 김굉필은 유배지에서 조광조를 가르치게 된다.

피바람을 몰고 온 무오사화가 끝을 맺으니 왕의 폭군 정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문충공 김종직은 두 번 죽는 불행을 당했지만, 중종 대에 이르러 그의 도학 사상을 이어받은 조광조에 의해 명예가 회복된다. 또한 1689년(숙종 15년) 그의 7대손인 김시락의 상소로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1708년(숙종 34년) 문간공에서 문충공으로 시호가 다시 복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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