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현실동화-엄지공주

입력 2016-08-24 04:55:02

오서은.
오서은.

그녀는 눈물을 삼키며 작은 주먹을 애써 꼭 쥐고 있었다. 어찌나 힘을 주는지 손톱이 그녀의 손바닥을 파고들 지경이었다. 제비는 그런 그녀가 안쓰러워 부드럽게 손을 잡아 풀고는 물었다. "자신까지 잃어버려선 안 되는 거였어요." "알아요." "알면서도 왜 그런 거죠?" 그녀는 천천히 눈을 들어 대답했다. "사랑하니까요. 나 자신보다 더." 그녀의 시선은 과거 속 어느 지점을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무언가에 맹목적인 이는 처음이었죠. 그러면서도 늘 불안해했기 때문에 처음엔 그저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었어요. 하지만…." 그녀는 말을 잊지 못하고 눈물을 다시 집어삼켰다. 제비는 그녀가 진정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얼마 후 그녀는 코가 막힌 목소리로 작게 읊조렸다. "그는 그냥 내가 필요했을 뿐이에요. 자신의 집에 들여놓는 가구처럼." "그도 분명히 후회할 거예요." 제비가 그녀를 다독였다. "어쨌든 그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그러자 제비가 답답함을 억누르며 조금 모질게 물었다. "그래서요? 이대로 굴속에 갇혀 평생을 보낼 건가요?" 제비의 말에 그녀는 갑자기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대답 대신 머리를 가로저으면서도 그녀는 눈물을 좀체 멈추지 못했다. 그녀는 그를 거부함과 동시에 온몸으로 그를 원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한참 바라보던 제비가 자리에서 일어나 날개를 펼쳤다. 두 사람이 앉아 있던 옥수수밭 앞에 겨우 들어오던 한 줌의 빛이 제비의 넓은 날개 아래에 큰 그늘을 만들었다.

"나와 함께 갈래요? 따뜻한 남쪽 나라에. 그곳에는 요정들의 왕자도 살고 있죠." 그녀는 예상치 못한 제안에 잠시 놀란 듯 눈을 껌벅거렸다. 그러고는 까맣게 잠든 굴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지금 떠나면 아마 다시는 그를 만나지 못할 터였다. "잠깐만요!" 그녀는 굴속으로 뛰어들어갔다. 굴속에는 두더지 특유의 체취가 가득했다. 한동안 정리하지 못한 방 안에 나뒹구는 두더지의 털들이 그녀의 눈에 밟혔다. 그녀는 털들을 모아 가지런히 정리하고 난 뒤 잠든 두더지의 머리맡에 앉았다. 그리고는 조용히 속삭이며 작별 인사를 했다. "우리는 각자 다른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나 봐요. 안녕, 내 사랑." 그녀는 두더지의 이마에 가만히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밖으로 뛰쳐나가 제비의 등에 올라탔다.

제비가 아까보다 훨씬 가벼워진 얼굴의 그녀에게 물었다. "괜찮아요?" "이제 가요. 동쪽으로." 제비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동쪽? 남쪽이 아니라요?"

"왕자가 아니라 나를 찾으러 가요. 이제 이 동화는 내 선택으로 쓰이게 될 거예요."

제비는 그녀의 대답에 씨익 웃었다.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날개를 휘저었다. 둘은 곧 빛이 쏟아져 내리는 하늘 위로 떠올랐다. 그리고는 두 번 다시 그곳에 나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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