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가 품은 인물 꽃으로 피다]<4>영남 사림파의 대스승 김종직

입력 2016-08-23 04:55:02

"과정 지켜야 실천의 길 열린다" 아버지 가르침 평생 두고 지켜

경남 밀양 부북면 제대리 한골마을에 위치한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생가인 추원재. 강호 김숙자 선생이 터를 잡고 그 아들 김종직 선생이 태어나 평생을 살았던 곳이다. 이곳은 조선시대 사림학파 유학자들의 정신적 고향과 같은 곳으로 많은 유학자들이 이곳을 찾아 두 분의 학문적 정신을 추모하고 기렸던 곳이다. 밀양시 제공
경남 밀양 부북면 제대리 한골마을에 위치한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생가인 추원재. 강호 김숙자 선생이 터를 잡고 그 아들 김종직 선생이 태어나 평생을 살았던 곳이다. 이곳은 조선시대 사림학파 유학자들의 정신적 고향과 같은 곳으로 많은 유학자들이 이곳을 찾아 두 분의 학문적 정신을 추모하고 기렸던 곳이다. 밀양시 제공
점필재 김종직의 지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예림서원(경남도 유형문화재 제79호). 1871년(고종 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으나 1874년 훼철의 부당함을 진정, 강당과 동재
점필재 김종직의 지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예림서원(경남도 유형문화재 제79호). 1871년(고종 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으나 1874년 훼철의 부당함을 진정, 강당과 동재'서재 등의 부속건물을 중건, 보수해 유림들의 강학과 집회소로 사용했다. 밀양시 제공
고령군은 대가야 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에 영남학파 종조인 점필재 김종직(1431~1492) 선생의 종택에서 소장하던 유물과 유품을 2005년 4월부터 상설 전시하고 있다. 고령군 제공
고령군은 대가야 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에 영남학파 종조인 점필재 김종직(1431~1492) 선생의 종택에서 소장하던 유물과 유품을 2005년 4월부터 상설 전시하고 있다. 고령군 제공

역성혁명으로 왕조를 세운 주체 세력들은 영구히 권력을 계승하기 위한 수단이 필요했다. 그들은 충절의 사표가 될 수 있는 인물을 내세워야 했다. 한때 강력한 정적이었던 고려의 충신 정몽주 길재 등을 추앙의 대상으로 삼았다. 백성들 사이에는 명분과 의리를 지킨 선비를 존경하는 사상이 싹트기 시작했다.

◆성리학의 종사 김종직의 탄생

김숙자 김종직 부자의 활동으로 그 사상이 뿌리 깊이 내리기 시작했다. 정몽주와 길재의 성리학 계보를 이은 김숙자 김종직 부자로 인해 영남 사림학맥이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 여기에 수양대군의 등극을 불의로 간주하였던 사육신과 생육신 그리고 낙향한 신진사류가 대거 참여했다. 그들 부자의 활동은 영남 신진사류들에게 활기를 불어넣어 훈구파에 의해 주도된 관학에 대항, 사학의 우뚝한 줄기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1431년(세종 13년) 6월, 고령현감 김숙자는 아내가 산고를 겪고 있다는 전갈을 받았다. 박홍신(朴弘信)의 무남독녀와 혼인하여 처가가 있는 밀양 땅에 자택을 둔 그는 다급하게 말을 몰았다. 늦은 나이에 출산하는 아내에 대한 걱정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산모는 오랜 산고로 지쳤는지 간헐적으로 신음만 낼 뿐 출산의 기미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초조한 마음을 달래려 글을 읽어 보았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벌써 날은 기울었다. 빛나던 뭇별들이 스러져 가고 온 밤을 떠돌던 눈썹달도 저만치 하늘 가로 밀려나 빛을 잃어 갔다. 녀석은 여전히 어미 배 속에서 태평스럽게 능청을 떨고 있었다. 저러다가 아이도 산모도 위험해지면 어떡하나 노심초사했다. '무엇이 될 놈인지 몰라도 제 어미를 너무 괴롭히는구나!'라고 생각하며 아기의 울음소리를 간절히 기다렸다.

세상의 모든 어미는 자식을 맞이하면서 목숨을 걸어야 함을 새삼 느꼈다. 그런데도 자식은 그 거룩한 정신을 모르고 살았다. 어버이가 되어서야 그 마음을 헤아리게 되니 그날따라 어머니가 더욱 보고 싶었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에 눈시울을 붉히던 순간 우렁찬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길고도 어두운 밤을 떨치고 나온 아침 해는 더욱 찬란했다. 숙자의 나이 마흔을 넘어 아들을 보았으니 훗날 영남사림의 종사로 성리학의 꽃을 피워 우뚝 선 대학자 김종직이었다.

◆아들의 스승이 돼 배움의 순서를 강조한 숙자

세자우정자에서 밀려난 숙자는 선산교수로 임명받아 고향으로 내려왔다. 늦은 나이에 낳은 아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들여다보며 세상사 온갖 시름을 잊으려 애썼다. 선산에서 개령, 성주 등지를 옮겨 다녔다. 태어날 때 그렇게 애를 태우더니 어느새 자라서 형들의 글공부를 곧장 따라 했다. 총기가 넘치는 아들의 눈을 바라보니 이제 공부할 나이가 되었음을 느꼈다. 세상의 이치와 원리, 인간의 역사와 생활의 지혜가 모두 들어 있는 학문의 기초인 천자문을 외우도록 했다.

"천지현황(天地玄黃)이며 우주홍황(宇宙洪荒)이라.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며 우주는 넓고도 거칠구나."

조그마한 입을 달싹이며 쏟아내는 아이의 글 읽는 소리는 청명한 물소리처럼 맑았다.

"허허! 건성으로 외우지만 말고 그 뜻과 의미를 익히도록 하여라. 글을 깨우치고 문장의 내용을 알게 되면 공부하는 즐거움이 새록새록 솟아나느니라. 옛사람들은 이를 문리를 깨우쳤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공부에 빠져 일취월장하게 되느니라."

숙자는 스승 길재의 가르침대로 배움의 순서를 특히 강조했다. 어린이가 지켜야 할 기본적인 도리와 예절을 적은 수신서(修身書) '동몽수지'(童蒙須知)의 '유학자설정속편'(幼學子說正俗篇)을 모두 암송시켰다. 그다음에 '소학'으로 들어갔다.

"공부할 때 차례를 뛰어넘어서는 절대 안 된다"며 그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효경' '사서오경' '자치통감' 및 '제자백가'의 순을 밟게 했다. 과정을 중시하는 것은 각 과정에 따르는 실천을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제대로 밟지 않고 건너뛰는 것은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 폐단을 불러오기 십상이라 여겼다. 과정을 지켜야 바른 실천을 행하는 길이 열린다고 생각한 숙자는 아들 종직에게 되풀이 강조했다.

종직은 아버지의 이 가르침을 평생을 두고 지켰다. '소학'을 중심으로 한 이러한 실천 강조 학풍은 김숙자에서 김종직을 거쳐 16세기 사림 사이에 일반적인 것이 될 정도로 큰 설득력을 발휘했다. 뒤에 영남사림파의 큰 학자로 드러난 김굉필은 스스로 '소학동자'라고 지칭하면서 30세까지 '소학'에만 집착했을 정도였다.

◆형제간 지극한 우애

소학을 통해 학문에 입문한 김종직은 12세에 시문을 쓸 만큼 뛰어난 문재였다. 인간관계의 도리를 실천하는 데 충실했으며 형제간 우애 또한 지극했다. 어느 날, 두 형님의 출타 중에 비가 내렸다. 거세게 내리는 비를 오롯이 맞아야 할 형님들이 몹시도 안타까웠다. 그 마음을 시로 남겨 남겼다.

바람 서늘한 객지의 길에 비가 추적추적 오는데(秋風客路雨凄凄)

한 벌의 비옷을 멀어서 가져다 드리지 못합니다.(一隻簑衣遠莫齎)

어느 곳 외딴 촌에 오늘 밤 주무시는지(何處孤村今夜宿)

말안장에 기대 졸며 새벽 닭 울기 기다리겠지요.(馬韆支宿候鳴鷄)

또한 종기가 심하여 맏형이 고생하고 있을 때였다. 지렁이를 삶은 물이 좋다는 의원의 말을 듣고 직접 맛을 본 뒤에 형에게 마시게 하였다. 아버지 숙자는 아비의 가르침대로 행하는 어린 아들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소학'의 가르침이 중요함을 또 한 번 느끼며 더 많은 인재의 양성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많은 제자에게도 한마음으로 가르쳤다.

◆첫 과거에 낙방

1446년(세종 28년) 16세의 종직은 학문이 일취월장하여 형과 함께 첫 과거 길에 올랐다. 소과에 응시하여 '백룡부'(白龍賦)를 지었다. 당연히 합격하리라 생각한 숙자는 찾아올 기쁜 소식에 마음이 들떠 있었다. 무엇보다 스승이신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모습을 생각하니 김종직의 마음이 급해졌다. 초조하게 기다린 결과는 낙방이었다.

'내가 지은 글이 부족했던 것인가? 아버지를 무슨 낯으로 뵈올까?'

김종직은 낙향 길에 한강변의 제천정(濟川亭)에 들러 당시 그의 답답한 마음을 시에 담아 벽에 붙였다.

雪裏寒梅雨後山(설리한매우후산) 눈 속의 찬 매화와 비 온 뒤의 산은

看時容易畫時難(간시용이화시난) 바라보기는 쉬우나 그림으로 그리기는 어렵네.

早知不入時人眼 (조지불입시인안) 일찍이 시인의 눈에 들지 않을 줄 알았으니

寧把臙脂寫牧丹 (영파연지사목단) 차라리 연지를 가져다 모란이나 그려야겠네.

시관(試官) 김수온(金守溫)은 '백룡부'를 펼쳐놓고 그 뛰어난 문장에 탄복했다. 그러나 시류에 비판적인 내용이 마음에 걸렸다. 낙방은 시켰지만, 장차 대제학이 될 만한 글솜씨라 생각했다. 김수온은 안타까운 마음에 세종에게 아뢰었다.

학문이 높은 세종이 '백룡부'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과거에 급제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학문이 예사롭지 않음을 꿰뚫어 보았다. 김종직에게 영산훈도(靈山訓導)를 제수하여 학문에 더욱 전념하게 했다. 그 후 부친 김숙자로부터 대학과 주역을 접하면서 종직의 학문은 더욱 깊어갔다.

어느 날, 김수온이 제천정을 지나다 현판의 시를 보았다. 담백하면서도 대가의 향기가 풍기는 시를 몇 번이나 되풀이하여 읽었다. 문득 지난날 자신이 안타깝게 낙방시켰던 '백룡부'가 떠올랐다. 김수온은 그 시의 주인이 종직이었음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스승 길재처럼 '충신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숙자

김숙자는 지방관으로 옮겨 다니며 공무의 여가를 이용해 유생들의 학업을 지도했다. 향교를 수리해 스승 길재의 가르침을 고스란히 제자들에게 가르치니 여럿이 생원진사 시험에 합격했다. 또한, 청렴한 관리였으며 행정 업무에도 능통했다.

고령현감으로 부임하고 보니 창고의 곡식이 장부보다 많이 부족했다. 전임자의 잘못을 감추려고 임기 내내 절약하며 문제를 조용히 해결했다. 토지와 백성을 사랑함도 학문을 배우는 길이라고 믿었던 숙자는 매년 곡식 종자가 없는 농가에 종자를 빌려주었으며 양식이 없는 사람에게는 환곡으로 도와주었다.

김숙자는 실패로 끝난 자신의 첫 번째 결혼 생활을 철저히 반성했다. 유교 경전에 기록된 예법을 지키며 성리학적 가족 윤리를 실천하느라 부심했다. 1454년(단종 2년) 4월 그는 66세로 성균관 사예(정4품)에 임명되면서 드디어 평상 따라다니던 이혼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성리학적 사회 개혁의 선두에 섬으로써 그는 재기했다. 누구도 그의 과거를 들먹이지 않았다.

그러나 성주교수관(星州敎授官)이란 한직이 마지막 벼슬이었다. 어린 임금을 사이에 두고 신권세력과 수양대군의 대립으로 한 차례의 피바람이 일었다. 급기야 수양대군이 단종을 밀어내고 왕위에 오르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스승인 길재의 정신을 이어받아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켜 결코 수양대군을 왕으로 섬기지 않았다.

그 비분함을 참지 못하고 마음의 병을 얻어 1456년(세조 2년) 그의 나이 68세로 세상을 떠났다. 1459년(세조 5년) 원종공신으로 중직대부예문관직제학에 추증되었고 1489년(성종 20년) 자헌대부, 호조판서를 가증, 후에 선산의 낙봉서원(洛峯書院)에 봉향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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