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다시 민주주의를 생각한다

입력 2016-08-11 05:20:05

1993년 3월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uclear Nonproliferation Treaty 'NPT) 탈퇴를 선언했다. 재래식 전쟁 준비만 해왔던 북한이 핵(核)을 무기로 들고 나오겠다는 의도를 공식화한 것이다. 북한 핵 위협의 시작이었다.

북한의 NPT 탈퇴 선언이 전해지던 때 기자는 미군과 우리 군(軍)이 함께 뛰는 팀스피릿 훈련장에 있었다. "이러다 큰일 나는 거 아냐. 제대가 몇 달 남지도 않았는데. 이게 뭐야. ××." 함께 훈련에 참여했던 다른 부대 소속 한 병장이 담배를 꼬나물더니 육두문자를 섞어가며 투덜거리던 기억이 생생하다.

육상 단거리 스타 우샤인 볼트처럼 빨리 돌아야 할 국방부 시계가 굼벵이 움직임으로 바뀔지 모른다는 걱정, 아니 미국의 심기를 건드린 만큼 팀스피릿 훈련의 여세를 몰아 '전군(全軍) 전투태세'로 갈 수도 있다는 염려가 당시 훈련장에 있던 군인들의 머릿속을 채웠다. 훗날 알려진 것이지만 당시 미국 클린턴 행정부는 북한에 대한 공습까지 감행할 생각을 했었다고 한다.

몇 달 있으면 병장, 1년만 더 참으면 전투모에 예비군 마크 달고 "전역을 명 받았습니다"를 외치는데. 기자 역시 남의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북한은 그로부터 3개월 후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NPT 탈퇴를 보류했고 그 이듬해인 1994년 제네바 합의를 통해 NPT 체제 완전 복귀를 선언, 일단 북한 핵 위기는 진정 국면을 맞는 듯했다. 걱정하던 그 병장도 조용히 제대를 했을 터이고, 기자 역시 연장 복무 없는 만기 제대의 꿈을 이뤘다.

그러나 23년 전 첫 핵 위협 이후 북한은 변하지 않았다. 아니 변할 수 없었을 게다. 2003년 북한은 NPT를 다시 탈퇴했고 최근엔 핵탄두를 실은 미사일을 미국 본토까지 날릴 수 있다며 으름장을 놓고 있다.

기자가 군 생활에서 체득했듯이 군은 적과 싸워 이기는 존재다. 이 때문에 우리 군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을 응징할 수 있는 최적의 무기 체계 구축을 군 최고 통수권자에게 보고했을 것이다. 그 결과물 중 하나가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의 성주 배치 결정이었을 게다.

그러나 대통령의 고백처럼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반대 목소리가 컸다. "미국의 요청'협의도 없었고 결정도 안 됐다"던 국방부는 갑자기 말을 바꿔 사드 배치 결정을 하는 동시에 배치 지역을 성주로 못 박아 버렸다. 성주 사람들은 밥상 앞에서, 참외 하우스에서, 밭고랑에서 이 소식을 들어야 했다.

사드라는 무기 체계 도입에는 배치 지역 민심을 고려하는 행정적 판단 및 사전'사후 조치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아예 없었다. 갈등 조정이라는 중대한 임무를 맡고 있는 정부는 역할을 외면했다. 군의 판단이 모든 것을 앞질러 일방통행으로 간 것이다.

군은 섭섭할지 모르지만 인천상륙작전을 이끌어낸 더글러스 맥아더 UN군 사령관을 보자. 그는 6'25전쟁뿐만 아니라 1'2차 세계대전에 모두 참여해 화려한 전공을 쌓은 미국의 전쟁 영웅이다. 하지만 6'25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51년 4월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 명령 불복종에 따른 해임 처분을 받게 된다. 만주 원폭 투하 등 확전을 요구했던 맥아더를 더 이상 놔둬서는 안 된다는 것이 트루먼의 판단이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를 거쳐 21세기까지 지구 상에서 가장 많은 전투를 치르고 있는 전쟁의 나라 미국. 하지만 결정적 순간에 총체적 국익을 고려, 군부의 주장을 뒤엎는 결정도 내려진다. 군에 대한 철저한 문민 통제(Civilian Control) 원칙이다. 1차 세계대전부터 수많은 전장을 누벼온 맥아더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대한민국을 위해 헌신해 온 우리 군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사드 배치 갈등에서 목격됐듯 군의 결정도 엄격한 문민 통제 아래에서 반드시 검증받아야 한다. 애국심이라는 한마디 구호만으로 병영의 철조망을 함부로 넘어 나올 수 없다. 그것이 민주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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