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칼날 위에 선, 조선의 마지막 황녀
고종이 몹시도 아낀 고명딸, 조선의 마지막 황녀, 일제강점기 일본에 볼모로 잡혔고, 이혼과 딸의 자살을 겪음, 오랫동안 정신질환으로 고통받았으며 실어증과 가난에 시달린 황실 가문의 비운의 여인. 마지막 생은 한국에서 보냈지만 덕혜옹주는 대중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고종이 환갑에 낳은 늦둥이 딸로, 깜찍한 외모와 어리지만 당당한 태도로 왕실의 사랑을 받은 인물, 그리고 비극적 생을 살았던 인물 정도로 알려져 왔다.
워낙 파란만장한 생을 겪어왔던 터라 덕혜옹주는 몇몇 신문기사와 여성지의 르포기사에서 주목을 받기도 했다. 미디어에서 그녀가 본격적으로 다루어진 것은 1996년 MBC 8'15 광복 특집극 '덕혜-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와 2007년 KBS 역사 다큐멘터리 '한국사 전(傳)'을 통해서였다. 그리고 2009년 소설가 권비영의 소설 '덕혜옹주'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보다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귀한 탄생과 비극적 죽음은 조선의 암울한 역사에 대한 은유가 될 수 있는 좋은 영화적 소재다.
'8월의 크리스마스'(1998), '봄날은 간다'(2001), '행복'(2007) 등으로 정통 멜로드라마에서 장기를 발휘하던 허진호 감독이 21세기 멜로 퀸 손예진과 손잡고 만든 실존 인물 드라마라는 점에서 특별한 일제강점기 소재 영화가 한 편 나올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기에 충분하다. 그간 심은하, 이영애, 임수정을 캐스팅하여 섬세한 내면 연기를 이끈 감독이기에 여배우-감독의 좋은 앙상블을 기다리게 했다.
8'15 광복절을 공략하며 영화가 개봉되었다.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황녀, 일본에 볼모로 잡힌 신세, 정략결혼, 왕가 복원을 우려한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으로 한국으로의 입국 거부, 뒤늦은 나이에 귀국, 쓸쓸하게 병마와 가난과 싸운 마지막 등 이미 알려진 역사 위에 영화는 개인 덕혜옹주를 둘러싼 일화를 픽션으로 덧붙인다.
1910년 일제의 조선에 대한 강제 국권 피탈 이후, 이완용을 포함한 친일파들은 고종(백윤식)을 노골적으로 궁지에 몰아넣는다. 어느 날, 고종은 의문의 죽임을 당하고, 이완용의 수하인 한택수(윤제문)는 영친왕(박수영)을 설득해 고종황제의 외동딸이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인 덕혜옹주(손예진)를 일본에 강제로 유학 보내기로 한다. 어쩔 수 없이 일본으로 떠나게 된 덕혜옹주는 유모인 복순(라미란)과 함께 새장에 갇힌 새 같은 삶을 살아간다. 그곳에서 어린 시절 정혼 상대자였으나 지금은 일제 장교가 된 김장한(박해일)을 만난다.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하는 김장한은 독립운동가의 수장인 김황진(안내상), 동료 복동(정상훈)과 함께 영친왕과 덕혜옹주를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망명시키려는 계획을 세운다.
영화를 이끌어가는 화자는 신문사 주필이 된 김장한이다. 그의 눈에 비친 덕혜옹주의 삶이 그려진다. 노인이 된 김장한이 1962년 당시 박정희 군사혁명위원회가 한일회담을 전격 발표하자 일본으로 가서 행방불명이 된 덕혜옹주를 찾아나서는 것에서 영화는 시작한다.
여기에는 약간의 각색이 들어가서, 실제로 덕혜옹주를 찾은 역사 속 인물은 김장한의 형인 기자 김을한이지만 드라마적 긴장을 위한 장치로 장한이 약혼자, 옹주의 보디가드, 그리고 그를 찾아낸 기자 역할을 모두 수행한다. 이 과정에서 덕혜와 장한 간의 로맨스가 생겨나서 영화는 인물들의 심리적 갈등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담아낸다. 멜로드라마 장르에 밝은 허진호 감독의 선택은 고증을 철저히 한 시대극이기보다는 애틋하지만 서로를 엇갈리게 하는 역사적 소용돌이로 인해 감정의 고통을 겪는 두 인물의 감정에 방점을 둔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덕혜가 악덕 일본 기업의 노역에 시달리는 조선인들 앞에서 조선말로 "희망을 잃지 말자"는 연설을 하다 핍박을 당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망명하려고 시도하는 등의 행위를 통해 영화는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성을 충분히 살려내려고 한다. 그러나 대한제국 황실의 생존자들이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데 몸을 사렸다는 점, 일제에 협력했던 자들이 곧 친미파로 변신하고 대한민국 건설의 주도자가 되었다는 아픈 역사적 사실이 영화에 간혹 드러나면서 개인 덕혜의 비극적 삶보다는 박복한 조선인'한국인 민초들의 삶이 더 아프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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