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준 '소문의 벽' ①
-결국, 작가는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다는 것인가.
-그랬으면 좋겠지만 침묵을 지킬 수는 더욱 없다. 작가는 누가 뭐래도 진술을 끊임없이 계속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는 족속이니까. 괴로운 일이지만 작가는 결국 그 정체가 보이지 않는 전짓불의 공포를 견디면서 죽든 살든 자기의 진술을 계속해 나갈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사람들이다. 만약 그럴 수마저 없게 된다면 그는 아마 영영 해소될 수 없는 내부의 진술욕과 그것을 무참히 좌절시켜 버리고 있는 외부의 압력 사이에서 미치광이가 되어 버리지 않고는 배겨날 수가 없을 것이다. (이청준의 '소문의 벽' 중에서)
선생님, 선생님이 가신 지 벌써 8년이 지나갑니다. 2008년 7월 31일, 선생님의 비보를 듣고 장흥으로 달려갔던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작은 것을 사랑하고 그 작은 것들을 정성껏 가꾸는 것을 좋아했고, 시키지도 않은 국 한 대접에 행복해하던 선생님의 마음과는 달리 세상 사람들은 헛된 욕망의 하수인이 되어 크고 높은 것만을 추구하면서 작디작은 스스로를 폄하하고 있습니다. 몇 년 동안 선생님의 글을 모았습니다. '벽과 문, 그리고 자기구원의 몸짓'이라는 제목으로 선생님의 글들을 리라이팅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일상의 바쁨에 빠져버린 후 선생님의 글들은 서랍 속의 공간만을 차지하는 버려진 마음으로만 남았습니다. 그러다 최근 장흥이란 곳으로 문학기행을 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버려두었던 지난날의 마음들을 다시 만났습니다. 장흥은 저에게도 무척 의미 있는 장소입니다. 1999년, 우리나라 모든 문학현장의 이야기를 만나겠다는 기획을 하고 처음으로 찾은 곳이 바로 장흥이었습니다. 아무런 안내 표지판도 없이 찾아간 선생님의 생가에는 다른 분이 살고 계셨습니다. '선학동 나그네'에 나오는 관음봉이 물에 비친 아름다운 형상도 목격했습니다. 정말 제 삶에서 기억에 남는 시간이었습니다. 이제 장흥은 우리나라 문학기행의 성지입니다. 어쩌면 그때의 작은 발걸음이 저의 문학의 삶, 그리고 장흥의 현재에 작은 출발이 되었다는 것이 뿌듯합니다.
선생님은 자주 글 쓰는 사람의 내면적 고통을 말하셨지요. '전짓불의 공포' 말이지요. 전쟁 중에 마을에 나타난 일군의 사람들, 경찰대인지 공비인지 확인할 수 없는 상황, 눈이 부시도록 밝은 전짓불, 전짓불의 뒤의 사람이 누군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당신은 누구 편이냐고 물었을 때의 곤혹스러움, 그 상황은 절망적이고도 공포스러운 일인 것이지요. 선생님은 그것을 글 쓰는 사람의 고통으로 연결하셨지요. 보이지 않는 전짓불 앞에서 일방적으로 자기진술만을 하는 글쓰기. 전짓불로 인해 전짓불의 주인은 볼 수가 없습니다. 결국 침묵이 정답인 것 같지만 말하고 글을 쓰는 사람은 그럴 수도 없는 것이지요. 그것만이 유일한 삶의 존재방식이니까요. 이런 단순한 낙서를 하고 있는데도 그 전짓불의 고통을 느끼는데 선생님의 고통이야 오죽했겠습니까? 그래도 침묵하지 않고 끊임없이 진술을 해야 하는 이유. 그건 바로 끊임없이 진술하지 않고는 살지 못하는 것이 바로 작가의 운명이니까 라고 선생님은 말씀하셨지요. 45년이 지나도 비슷한 공포를 느낀다면 바로 거기에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현재가 존재하는 것이겠지요. 좌파냐? 우파냐? 하는 구분을 넘어서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중도파라고까지 구분하는 편 가르기의 나라. 편의 논리는 자꾸만 소문을 생산합니다. 소문 속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전짓불의 공포, 효과적인 복수를 위해 소문의 옷을 입은 전짓불의 간섭, 정말 사람들은 그런 소문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확대 재생산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은 적어도 소문 속에서 태어난 또 하나의 소문이 될 수는 없는 것이겠지요?
선생님, '소문의 벽'이 발표된 해가 1971년이지요? 철저한 자기검열 속에서, 소위 전짓불의 위협 속에서 살아갔던 그 시대 지식인의 자화상이 작품에 드러납니다. 이미 45년이 지난 소설이 여전히 현재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 슬픈 일이겠지요. 문제는 선생님처럼 철저하게 현재를 고민하는 글도 이젠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것이겠지요. '잠수함의 토끼'가 사라진 시대는 결국 잠수함의 침몰을 만날 수밖에 없겠지요. 담배를 물고 계신 선생님의 모습이 오히려 원망스러운 건 저 같은 어리석은 사람만을 남겨두고 이미 다른 세계로 떠나신 선생님에 대한 그리움의 크기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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