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해는 이미 기울어 가니…내 운명도 이와 같구나"
노을이 곱게 물든 산정에 황금빛 날개를 펼친 까마귀가 날아갔다. 그 모습을 본 아도화상은 그 산을 금오산으로 이름 지었다. 그는 이미 금오산이 인재의 산실이 될 것을 예견했다.
삼족오의 땅 구미는 태양의 정기가 넘쳐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이는 금오산에 은거해 반평생 군사부일체의 윤리를 몸으로 실천한 야은 길재에서 비롯됐다. 야은 길재는 절의에서 우러난 꼿꼿한 선비정신을 문인'제자들에게 가르쳐 영남 사림의 정신적 바탕이 됐다.
창간 70주년을 맞은 매일신문은 야은 길재 선생의 충효사상, 도학사상, 교육사상을 모두 10차례에 걸쳐 재조명하기로 했다.
◆충절의 정신을 키운 도령
1365년(공민왕)의 봄. 구미 냉산 신라 최초의 사찰이라고 전해지고 있는 도리사에는 춘정에 겨운 벌들이 꽃을 찾아 날아들었다.
복숭아'자두 꽃이 흐드러진 꽃길 아래 쪽 진 머리를 한 아낙이 어린 딸을 앞세워 도리사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수심에 찬 여인과는 달리 꽃향기에 취한 듯 폴짝대는 계집아이의 모습이 봄기운과 함께 들떠 있었다.
도리사에서 글공부를 하다가 춘몽에 빠져들던 어린 도령은 잠을 쫓기 위해 잠시 선원 밖으로 나왔다. 짝을 부르는 새소리는 산 가득하고 봄꽃은 피어 그 향기가 몽롱했다. 꿈인 듯 나타난 소녀의 모습에 잠에 취한 눈이 번쩍 뜨이는가 싶더니 가슴에 다듬잇돌이 놓인 것처럼 방망이질 쳤다.
도령은 그들이 점점 가까워지자 선원의 기둥 뒤로 잽싸게 몸을 숨겼다. 스스로 놀란 도령은 읽다가 만 대학(大學)을 다시 펼쳐 마음을 다스리려 했지만, 책 속에는 온통 소녀의 얼굴로 가득 차 있었다.
법당에서는 두 손 모은 여인의 기도가 간곡했다. 108배를 따라 하던 아이는 여인이 세 번을 일어설 동안 한 번도 일어나지 않고 고개를 동그랗게 말아 법당 바깥쪽을 살피고 있었다.
그러다가 법당을 엿보던 도령과 눈이 딱 마주쳤다. 수줍은 듯 웃고 있는 소녀의 양 볼에 복숭아 빛이 번졌다. 도망치듯 돌아 나온 11살 도령의 가슴에 찾아온 봄기운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도령은 스님이 마시다 남긴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스님은 이 떨떠름한 차를 무슨 맛으로 마실까 생각했지만, 속이 타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다기에 남아 있던 차를 모두 마시고 나서야 겨우 마음이 진정되었다. 도령은 글공부를 하다가 불현듯 법당을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어디 사는 누군지도 모르는 소녀가 생각날 때마다 차로 마음을 다스렸다. 차에는 가을에 서리를 맞으면서 시작해 한겨울에도 하얗게 꽃을 피워내는 사철 푸른 차나무의 기운이 녹아 있었다.
어느새 차를 음미하게 된 도령은 그 기운을 마시며 변치 않는 충절의 정신을 키웠다. 그 뿌리는 직근(直根)의 성질이 있어 어린 도령에게 올곧은 선비정신을 가다듬게 했는지 모른다. 도령은 훗날 고려가 패망한 이래 조선왕조로부터 여러 차례 부름을 받았으나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의 절의를 지킨 야은 길재였다.
◆길재는 구미 해평 사람
길재는 경상도 선산부의 속현인 해평땅 봉계리(지금의 고아읍 봉한리)에서 1353년(공민왕 2년)에 태어났다. 두뇌가 총명하여 글공부를 좋아했으며 천성도 착했다.
길재가 여덟 살 때 아버지 원진이 보성대판에 임명돼 전남 보성으로 가게 되었다. 시골 관아의 벼슬자리는 녹이 변변치 않았다. 여러 식구를 부양할 처지가 아니었다. 생각다 못한 어머니는 길재를 외가에 맡겼다. 어린 길재는 부모의 정이 그리워 할머니의 여윈 가슴에 안겨 울먹이곤 했다. 고샅길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고 한 줄기 바람에서조차 어머니의 냄새를 맡으려 코를 씰룩거렸다. 삼간이부청, 칙호읍이수지
소학을 읽고 있던 길재는 눈물을 흘리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曲禮曰 子之事親也 三諫而不聽則號泣而隨之'(곡례왈 자지사친야 삼간이부청칙호읍이수지: 곡례에 이르기를 아들이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 세 번 간하여도 들어주시지 않으면 울부짖으며 어버이를 따른다)라고 쓰인 책장에 눈물이 얼룩져 있었다.
길재는 어버이를 섬기려 해도 곁에 계시지 않음을 한탄하며 남계천에 쪼그리고 앉았다. 물 위를 떠도는 흰 구름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물속에서 돌 하나를 건져 올렸다. 신기하게도 자라와 똑같이 생겼다. 그것을 마치 엄마와 떨어진 새끼 자라인 듯 조심스럽게 손바닥에 올려놓고 어머니로 향한 석별의 정을 한 편의 시로 풀어냈다. 이때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후일 효성으로 발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鼈兮鼈兮 汝亦失母乎(자라야 자라야 너도 엄마를 잃었느냐)
吾亦失母矣 吾知其烹汝食之(나도 엄마를 잃었다 너 잡아먹을 줄 내 알지만)
汝之失母猶我也 是以放汝(엄마 없는 나와 같기로 너를 놓아주노라.)
빨래하던 마을 아낙의 입에서 시작된 소문은 길재의 어머니에게까지 전해졌다. 길재의 어머니는 아들이 총명하여 온 마을 사람들을 감명시킨 일보다 하찮은 돌 하나를 들고 마음을 나누려 했던 그의 외로운 심정이 안쓰러워 가슴이 메었다.
◆학문에 대한 깊은 열정
길재는 11세에 냉산 도리사(구미시 해평면)에 들어가 글공부를 시작하며 문장을 차츰 익히기 시작했다. 18세에는 상산(商山-지금의 상주)에 사는 사록(司祿) 박분(朴賁)에게 논어와 맹자를 배우며 성리학에 입문했다. 그해에 관직에 진출한 아버지를 찾아 개경으로 거처를 옮겼고 정몽주, 이색, 권근 등 당대의 석학들을 통해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접하면서 학문에 정진했다.
더 넓은 세상으로 진출한 길재의 학구열은 불타올랐고 학문은 더욱 깊어졌다. 그의 나이 스물두 살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이 되었다. 이때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과 만나게 된다. 이방원은 길재의 바르고 강직한 됨됨이와 학문을 추구하는 자세를 존경하여 자주 만나 학문을 토론하곤 하였다. 길재도 자신을 따르는 이방원을 동생처럼 아꼈다.
평소에 효성이 지극했던 길재는 사마감시에 급제하여(1383년 우왕 9년) 금주지사(지금의 충남 금산)로 재직 중인 아버지의 임지를 찾아간다. 그곳에서 지내던 중 신면의 딸과 혼례를 올린다. 바로 이듬해 아버지가 임지에서 세상을 떠나고 탈상하는 해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청주목의 사록 벼슬이 주어졌으나 부임하지 않고 학문 닦기에 힘썼다.
1387년(우왕 13년)에 성균관 학정이 되고, 1388년(우왕 14년) 순유박사를 거쳐 성균관 박사로 승진하였다. 성균관에서는 태학의 유생들이 그를 따랐으며 집에 있을 때는 양반 자제들이 모여들어 배우기를 청하였다. 이때에 그는 실천성리학자로서 발돋움하게 된다.
◆서쪽 하늘로 기울어버린 해
1388년(우왕 14년) 성균관에서 바라다보이는 서쪽 하늘에는 해가 기울고 있었다. 그날따라 석양은 마치 짐승의 생혈처럼 검붉었다. 수심에 가득 찬 얼굴로 하염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던 길재는 넘어가는 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500년 동안 고려를 비추던 해였다.
명나라를 치려고 요동 정벌에 나섰던 이성계 장군이 왕명을 어기고 위화도에서 회군하더니 급기야는 최영 장군을 죽였다. 우왕은 폐위되고 그의 아들 창왕을 허수아비로 세워 나라 정치를 전단하기 시작했다. 그들에 반대했던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길재는 고려왕조의 쇠망을 직감했다. '조만간에 많은 이들의 피를 머금은 해가 동쪽 하늘을 비릿하게 물들이겠구나. 나는 오직 고려에 충성을 다하려 하나 해는 이미 기울어 가니 내 운명도 이와 같구나' 하며 탄식했다. 쇠퇴해 가는 고려왕조를 향한 길재의 결연한 의지를 '성균관에서 우연히 읊음'이라는 시로 표현했다.
龍首正東傾短墻(용수산 동쪽 기슭 야트막한 담장이 기울었고)
水芹田畔有重陽(미나리 논 가에는 버들가지 늘어졌네.)
身雖從衆無奇特(몸은 비록 남을 좇아 특별히 뛰어난 것 없지만)
志卽夷齊餓首陽(뜻인 즉슨 수양산에서 주려 죽은 백이숙제 그것이라네)
은나라에서 주나라로 왕조가 교체되자 백이와 숙제는 두 임금 섬기기를 거부하고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캐 먹다 굶어 죽었다. 길재는 백이와 숙제의 충절을 흠모하며 스스로 그렇게 되기를 결심했다. 마치 기다리고나 있었던 듯이 야은에게도 백이와 숙제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의 날이 다가오고야 말았다.
◆청렴한 선비의 낙향
1389년(창왕 1년)에 최고 정무기관인 문하부의 7품직인 문하주서(門下注書)가 되었으나 이듬해 38세에 늙은 어머니를 봉양한다는 명분으로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선산으로 돌아갔다. 낙향하는 길에 일부러 큰 스승인 목은 이색을 찾아가 하룻밤을 묵었다.
구미로 돌아온 길재는 금오산 산중 마을인 대혈동에 들어가 부인과 2남 3녀의 가족과 함께 은거했다. 청렴한 선비의 낙향은 끼니 걱정을 해야 할 만큼 가난했다. 얼마 안 되는 전답은 박토여서 입에 풀칠할 방도가 없었다. 식구들은 굶어도 노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반찬 없는 밥상을 올리지 않았다.
침실에 조석으로 문안드리는 지극한 효심에 부인 신씨도 본받지 않을 수 없었다. 시집올 때 가져온 물건들을 죄다 팔아 노모를 극진히 공양했다. '우리 어머님이 늙으셨으니 뒷날 비록 위해 드리고 싶어도 드릴 수 없을 것이다' 하며 마음을 다해 어머니를 받들었다.
비둘기의 울음이 하도 구슬프게 들려 마음이 심란한 날이었다. 귀를 막아 보았지만, 마음이 진정되지 않더니 기어이 슬픈 소식이 날아왔다. 이색과 도은 이승인의 유배 소식에 이어 다음 해에 유배 중이던 우왕이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1392년에는 정몽주가 격살당했고 뒤이어 고려 왕조가 멸망했다는 비보가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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