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 7월 27일

입력 2016-07-26 21:05:53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침략을 개시했다. 남침 암호명은 '폭풍'. 명령이 떨어지자 북한군은 개성, 포천, 춘천, 양양 등 4개 축선 11개 지점에 이르는 38도선 전역에서 남으로 폭풍처럼 밀려들었다.

이날은 일요일이었다. 국군은 6월 24일 군에 내려졌던 비상경계령을 해제해 두고 있었다. 대신 농촌 모내기를 도우라고 사병들에게 2주간의 특별 휴가를 줬다. 경계령은 풀렸고 휴가에 주말이 겹쳤다. 전쟁이 터졌을 때 우리 군 부대 병력의 절반가량은 외출 중이었다.

남침 통일을 벼르던 김일성은 이렇듯 치밀했다. 미군이 500명 정도의 군사 고문단만 남기고 남한에서 철수할 때를 기다릴 줄도 알았다. 이미 소련 지도자 스탈린으로부터 남침 허가도 얻어둔 상태였다.

남북 군사력은 심하게 어긋났다. 북한군은 T-34 소련제 탱크 242대와 170여 대의 전투기로 무장한 반면 국군은 탱크와 전투기는 전무했고 20여 대의 훈련용 연습기와 연락기가 고작이었다.

김일성은 미군이 한반도에 상륙하기 전 전쟁을 끝낼 계획이었다. 전쟁 개시 후 이틀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보름이면 군산-대구-포항선, 한 달 안에 남해안에 진출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실제로 전쟁 발발 사흘 만에 국군은 서울을 내줬다. 정부는 서울에서 대전, 대구를 거쳐 부산까지 수도를 옮기느라 바빴다. 김일성이 꾼 무력 통일의 꿈은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하지만 김일성도 미군이 그토록 신속하게 개입할 줄은 몰랐다. 전쟁 6일 만에 미 지상군 선발대가 부산에 도착했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중국을 등에 업은 북한군 역시 강했다. 미군이 주축이 된 유엔군은 북한군의 저항을 힘들어했고, 북한군 역시 뛰어난 전력을 가진 미군을 두려워했다. 어느 쪽도 절대적 힘의 우위를 보이지 못한 전쟁은 3년을 끌었다. 그 사이 피해는 컸다. 국군 14만 명, 유엔군 4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북한군 51만 명, 중국군 15만 명도 희생됐다. 양측은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에 조인했다. 우리나라는 이날을 정전협정 기념일로 기리고 있다. 정전(停戰)은 종전(終戰)과 다르다. 그야말로 휴전 상태다. 오늘로 정전 63년을 맞았다. 세월 탓인지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라 휴전 상태라는 사실을 잊고 사는 국민이 너무 많다. 지난 63년간 남한에서 정권은 수도 없이 바뀌었지만 북한에서는 똑같은 정권이 세습되었을 뿐 단 한 차례도 바뀌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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