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화면에 비친 화가 이우환 씨는 지치고 화난 표정이었다. 여든 해를 넘긴 얼굴엔 노년의 선들이 움푹했다. 기자들에게 빙 둘러싸인 그는 "당신들이 깡패요!"라고 거칠게 내뱉으며 범죄자들이나 드나드는 건물 속으로 사라졌다. 당혹스러운 풍경이었다. 국제적인 명성의 한복판에 섰던 예술인이 왜 저런 야단법석의 중심에 서 있는 걸까?
필자가 이우환 씨를 처음 만난 것은 대구의 어느 한정식집이었다. 몇몇 화가와 화랑주, 그리고 지인들이 모인 그의 개인전 뒤풀이 자리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식탁 앞에 앉은 이우환 씨는 차려놓은 음식만 물끄러미 쳐다볼 뿐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곁에 앉은 그의 부인이 "뭐 좀 드시지요"라고 말하자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른데…"라며 싱긋 웃었다. 그리고 침묵했다.
깡마른 체구에 이미 반백이었던 그는 좀 낯설고 별난 미술가로 보였다. 당시 일간지 미술기자였던 필자였지만, 이우환 씨에 대한 정보나 작품에 관한 지식이 미미한 상태라 어떤 질문도 만들 수 없었다. 조금 전 화랑에서 본 그림들은 가로로 혹은 세로로 죽 그은 선들이었고, 몇몇은 붓으로 단정하게 찍은 점이 화면을 장식하고 있을 뿐이었다. 무슨 메시지일까.
이튿날 필자는 전시장으로 다시 갔다. 위로부터 아래로 한 번에 내리그은 선이 눈앞에 들어왔다. 붓이 처음 닿은 곳은 물감이 많아서 진하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희미해지다가 사라졌다. 가로로 그은 선 역시 기법은 비슷했다. 마치 혜성이 꼬리를 달고 하늘 한가운데로 지나가다가 이내 사라지는 장면 같았다. 그 옆에 걸린 형상은 단 하나의 사각형 점이었다.
이번에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텅 빈 화면 속에 외롭게 칠해진 푸른색과 검은색 계열의 붓질이었다. 얼핏 보면 단 한 번의 터치로 완성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여러 번 칠해진 흔적이었다. 첫 번째 붓질과 마지막 붓질이 지층처럼 여러 겹 중첩되어, 일부는 드러나고 일부는 감춰진 것이다. 그리고 물감 속에서 작은 돌 알갱이들이 사각거리고, 미세한 붓털이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오호라! 그는 지금 화면을 통해 드러냄과 숨김의 게임을 펼친 것이다. 드러내는 듯 숨기고, 숨기는 듯 드러내는 삼라만상들, 그것을 특유의 붓질로 형상화한 그림으로 추측했다. 나의 그림 이해가 정확하게 맞았는지 틀렸는지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각각의 액자 밑에는 '선으로부터' '점으로부터'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색다른 미술체험이었다. 그리고 잊혀갔다.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 그림들이 몇몇 짝퉁 시비에 휘말려 이우환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더구나 미술 문외한들에 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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