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시베리아 벌목공
결국 1997년 늦가을, 그토록 바라던 대망의 출국 길에 올랐다. 작별 전날 밤, 아내는 2살짜리 딸아이를 안은 채 말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으나 돈 벌어서 돌아오리라는 희망에 들떠 있었던 나는 아내를 제대로 한 번 안아주지도 못하고 떠나왔다. 대저 풍경 소리가 제아무리 그윽하다 한들 바람 없이는 울림도 없는 것을, 그것이 마지막 별리가 될 줄 알았더라면 단 일 초, 일 분이라도 아껴서 더 잘 해주고 오는 건데, 살겠다고 뼈아프게 고생만 시키고 온 일들이 지금은 통한으로 남아 있다.
내가 파견된 현장은 '하바롭스크'에서 3시간가량 떨어진 깊은 숲속이었다. 말이 숙소이지 낡아빠진 네 평짜리 컨테이너 하나에서 다섯 명의 노동자가 눈 녹인 물로 밥을 끓여 먹고 있었는데 짐승 같은 식생활에 겨우 허기나 면하는 정도였다. 실의에 빠진 나를 보고 "동무, 건더기 먹은 놈이나, 국물 먹은 놈이나, 나중에 허기지긴 매한가지요, 기왕에 온 거, 어떻하갔시오"라고 했지만, 곤고함을 체념하고 자위적으로 하는 그 소리가 위로는커녕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떤 것도 가릴 처지가 못 되는 그들이 내 눈엔 그냥 아무 여물이나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노새 같아 울화가 치밀고 억울하였다.
날이 밝으면 나가서 아름드리나무를 베고, 또 베어 다듬어서 차량으로 실어 나르고, 땅거미가 지면 꾸벅꾸벅 컨테이너로 들어가 저녁밥을 지어 먹고, 그다음엔 잠들기 위해 또다시 추위와 씨름을 해야 하는 일이 일과의 전부인 노예 같은 생활. 청운의 꿈을 안고 시베리아에 왔건만, 이전엔 상상도 한 번 해 본 적이 없었던 눈앞의 광경에 억장이 무너졌다. 꿈도, 희망도 순식간에 와장창 박살이 나버렸다.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리라, 시베리아가 나에게 부를 안겨 줄 도약의 현장이 되리란 기대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다고 자각한 순간, 내 희망은 천 길 아득한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낙심은 잠시고, 군화에 밟힌 민들레처럼 찰나에 오기가 벌떡 살아났다. 그동안 어떻게 하면서 내가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와서 못 할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만약 내 작은 몸뚱이를 조국으로 가정한다면, 위난에 처한 국가의 존위를 위해 무슨 일인들 불사하랴. 기꺼이, 굴절된 운명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가 되리라, 자신한테 굳센 맹세를 하게 되었다. 그런 현실 인식은 대번에 절망을 가능성으로 뒤집어 놓았는데 결국 천국과 지옥을 오간 것은 한 끗 차이의 생각에 불과하였다.
시베리아의 겨울은 유난히 빨리 오고 또 길다. 개울로 나가 씻을 수 있는 여름은 그나마 다행인데, 가을부터 기온이 영하로 오르내리는 시베리아 오지의 혹독한 추위는 난방 시설이 잘 된 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한기 때문에 이듬해 여름이 되기 전까지는 항상 옷을 껴입은 채 웅크리고 살았다. 추위를 잊으려고 밤에는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쓴 채, 입김으로 한기를 데우면서 잠을 청했다. 그래도 그 고생을 참고 견딜 수 있었던 힘은 말할 것도 없이 돈 벌면 나도 어서 고향에 가서 보란 듯이 잘 살 것이란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을 지탱할 수 있는 유일한 위안이자 버팀목인 셈이었다.
죽어도 그날 주어진 일의 할당량을 채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암만 고단해도 고되다는 이유로 일을 쉴 수는 없었다. 그곳의 법칙은 '과붓집에 가서 바깥양반을 찾으라'고 한대도 군말 없이 찾는 시늉이나마 해야만 하루가 무사히 넘어갔다. 끝없이 울창한 시베리아의 숲은 어찌 그리도 광대한지 베고 또 베어내도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이 거대하고 깊었다. 나는 다행히 운전 기술을 인정받아 지역 건설 중대로 배치를 받았는데 나무를 실어 나르는 것이 주된 임무라 극심한 중노동만은 면할 수가 있었다. 덕분에 여기저기 목재를 실어 나르느라 오지로 다니면서 동포인 벌목 노동자들의 생활이 얼마나 고달프고 비참한 것인지 연민이 가득한 마음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어느 날은 러시아 철도청으로부터 수주받은 일을 하느라고, 건설 중대 노동자 두 사람이 철길로 뻗은 나무 가지치기를 하다가 열차에 치여 즉사했다. 팔다리가 절단되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한 사고였음에도, 현장에는 사고를 살피는 경찰관이나 해당 관청 직원의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보상금도 한 푼 없는 두 동포의 시체는 즉각 북한으로 보내졌다. 그들의 유품을 수습해서 보내는 일을 전부 내가 맡아서 했는데 유품이래야 다 헐어빠진 작업복 몇 벌이 전부인 것을 챙기면서 나도 죽으면 이렇게 불쌍한 빈털터리로 돌아가겠구나 싶자 유품 꾸러미 위로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 좋은 부모 만난 사람들은 앞길이 훤한데, 나는 결국 백척간두 장대 끝에서 떨어질까 무서워 안간힘을 다하는 비참한 한 마리의 작은 새에 불과하였다.
소금 먹은 놈이 물을 켠다는 건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뇌물을 쓰게 되면 반드시 효과가 나타난다는 그간의 경험을 믿었기 때문에 그 일을 행동에 옮기는 데 주저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덕분에 간절히 소망하던 다른 외화벌이 부서로 옮겨가는 데 별로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새로 배정받은 부서에서는 러시아인의 별장 짓는 일에 참여했고 얼마 후, 그곳 경리가 본국으로 귀환되는 틈을 타서 운 좋게도 내가 대신 경리 일을 맡게 되었다, 노임 계산과 식량 공급, 상점 운영 등의 업무를 보면서 간부의 이익을 챙겨주는 등 실력자와의 친분을 도모하는 데 온 정성을 쏟았다. 그러나 일 년도 안 돼서 각 부서의 직제를 없애고 귀환하거나 벌목 현장으로 다시 나가라는 명령이 떨어지는 바람에 또다시 곤경에 빠지고 말았다. 모은 돈도 척푼 없는 상태에서 절대 원점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가뭄에 빗방울처럼 몇 개월 만에 겨우 한 번씩 받아 보는 아내의 편지에는 아직 돈표를 받은 적이 없다고 씌어 있었다. 그것도 현금으로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상점에서 물건을 살 수 있는 전표를 준다는 것인데, 그마저도 구매 차례가 오기까지는 1년이 걸릴지 2년이 걸릴지 제때에 나오는 법이 없고, 배경이 없는 사람한테는 그것이 종이쪽지에 불과한 것이란 사연에 기가 막혔다. 무엇보다 제일 안타까웠던 점은, 어려움을 호소하는 아내한테 아무런 도움도 줄 수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노임의 70%는 집으로 보낸다고 해서 나머지 30%만 현장에서 직접 용돈으로 받아 썼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한 달 담뱃값도 안 되는 액수라서 돈을 모으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사정이 그 지경이니까 벌목 현장에서 견디지 못한 일부 노동자는 근무지 이탈을 하고 도시에서 유랑 생활을 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물론 에는 돈을 조금 벌면 간부에게 뇌물을 써서 근무지 이탈 문제를 무마하고 귀국한 사람도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에도 급급한 사람이 대다수였다.
나는 그동안 안면을 익혀놓은 업무부 지배인에게 돈을 벌면 매달 상납할 테니 도시로 나갈 수 있게 해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하였다. 달마다 꼬박꼬박 상납하겠다고 내가 제시한 금액은 100불이었다. 한 달에 100불씩 뇌물을 챙길 수 있다면 굳이 북으로 귀국 조치시키거나 현장으로 보낼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간부는 군소리 없이, 나를 기업소에서 멀지 않은 소도시 '블라고웨친스코'로 나가게 해 주었다. 이젠 됐다, 소원을 이루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 자리에서 펄쩍펄쩍 뛰고 싶을 만치 신나고 기뻤다. 미구에 어떤 일이 전개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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