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형이나 다름없이 분류된 출신 성분, 굴욕·모욕 참아가며 당원이 됐지만…
대상 수상작 논픽션 '에스케이프'의 주인공은 북한 평안도 정주 출신으로, 김일성대학을 수료했다. 아버지의 출신 성분 때문에 핍박받다가 온갖 노력 끝에 노동당원 자격을 취득했으나 사정은 여전히 여의치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러시아 벌목공으로 나갈 수 있었으나 돈을 벌기는커녕 그곳 생활 역시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2002년 2월 러시아를 탈출, 2005년 우즈베키스탄 체류 중 UN 난민지위를 획득하고 2009년 10월 대한민국에 입국했다.
그는 경북 경산의 농가에서 일용직으로 일했으며, 그 과정에서 이 글을 쓴 전병하 씨에게 그간 살아온 이야기를 털어놨다. 이 작품은 글쓴이 전병하 씨가 탈북인의 이야기를 글로 옮긴 것이다. -편집자 주(註)-
1. 프롤로그
나는 이른바 새터민으로 불리는 탈북자이다. 숨 쉬는 것 말고는 어느 것도 온전한 것 하나 없이 피폐하게 살다가, 고준(高峻)한 역경의 산맥을 넘어 자유 대한으로 왔다. 일신의 안위가 풍전등화 같았던 시절에 비하면 지금의 안녕은 분에 겨운 사치나 다름없지만, 생경한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어려움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빈껍데기 같았던 삶에 이만하면 되었다 싶어도 문화와 생활수준이 확연히 대조적인 환경에 노출되다 보니, 지레 위축되고 주눅이 드는 것만은 부인할 수가 없다. 딱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새로운 환경에 익숙해지기까지는 아무래도 시간이 조금은 더 필요할 모양이다.
목숨을 담보한 사투의 대가(代價)가 오늘의 행복이라고 생각하면 지난(至難)했던 세월에 굴하지 않았던 내가 대견스럽기도 하고, 은근한 자긍심도 고무적이다. 지나온 길을 한 번씩 돌아다보고 옴니암니, 할 수 있는 여유도 실인즉 그런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니랴. 그저 숨 쉴 만해지니 그 틈 사이로 너울 같은 그리움이 막 밀려온다.
버리고 떠나온 땅일지라도 피붙이들이 있는 고향이기에 어쩌다 TV에서 북한, 소리만 나와도 귀가 쫑긋해지고, 덩달아 생사를 알 수 없는 부모님 걱정이며, 작별할 때 아장아장 걸었으니 지금은 학교에 다닐 만큼 자랐을 딸아이 생각, 긴 세월 소식 없는 남편을 기다리다 지쳤을 아내에 대한 연민 등등, 걷잡을 수 없는 마음은 어느새 북녘 집 사립문 안을 훌쩍 넘는다.
어디로 가나 눈길 닿는 곳마다 넘쳐나는 고급 생필품과 온갖 먹을거리들을 보면, 함께 누릴 수 없는 가족들이 눈에 밟혀 가슴이 에인다. 좋은 것 보면 주고 싶고, 맛있는 것 있으면 먹이고 싶다는 의망(意望)으로 잠 못 들고 뒤채다 보면, 먼데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음이 여기가 고향집이 아님을 실감케 해, 번번이 둥지 밖으로 외떨어진 현실을 통감한다. '물은 흘러도 여울은 남는다'더니 세상살이 변하고 나도 많이 변하였건만 도리어 생생해지는 것은 지병 같은 향수(鄕愁)뿐이다.
나는 평안도 탄광마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다. 부모님과 형제 중 둘째인데 남들보다 체구는 작았으나, 작은 고추가 맵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다부지고 말썽 또한 끊임이 없었다. 그 때문에 부모님 속을 적잖이 썩이면서 청소년 시절을 보냈는데 그런 나를 보고 어머니는 언제나 그러셨다.
"내 강생이(강아지)는 크면 이 담에 그저 우리 조선 어드메서라도 한 대가리를 할끼야, 꼬랑댕이가 앙이라 명태 대가리라도 대가리를 할끼야."
나중에야 대가리를 할망정, 국가 경제가 도탄에 빠져 있었던 1990년대 당시에는 먹고사는 일이 얼마나 곤고한지 그 피폐함을 말로 다하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공산치하에선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소수의 특권 계층을 제외하곤 너나없이 매일 끼니 걱정을 하면서 살았다. 그래도 그땐 그 궁핍을 운명으로 여겼기에 응당 감내하고 불평할 줄 몰랐다. 우리 집은 더군다나 출신 성분이 나쁘다는 낙인이 찍혀 있어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난이 깊었다. 까닭인즉 6'25때 아버지가 인민군 참전 포로수용소 생활을 했다는 것 때문에 당신은 평생을 탄광의 갱도에서 일해야 했고, 우리들은 그 아버지의 자식이란 이유로 전정(前程)이 암담하였다.
굶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무엇이 어렵고, 무엇이 괴롭네 하지만 짐작도 못 할 괴로움이 배를 곯는 일이란 사실을…. 그 고통을 면하려고 출산한 지 사흘밖에 안 된 아내까지도 양식을 구하는 일에 나섰다. 산후풍으로 몸을 덜덜 떨고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퉁퉁 부은 발에 물집이 잡혀 아프다고 질겁하면서도, 길이 암만 멀어도 들로 산으로 장마당을 헤매면서 식량을 보충하고 확보하는 일에 매달려야 했을 만큼 현실은 참담하였다.
궁한 새는 숲으로 가면 쪼을 것이라도 있지만 잠을 자도 먹는 꿈만 꾸게 되는 빈한의 참혹함은 내 유치한 필설(筆舌)로는 형언하기 어려우니 안타까운 노릇이다. 천형(天刑)이나 다름없이 분류된 성분 때문에 우리는 그저 주어진 노동 외엔 취사선택의 여지도 없이 살았다. 설령 천하제일의 맹금이라 한들 박제된 상태라면 무슨 재주로 사냥을 할 것이던가. 내가 어떻게 해서라도 이 비참한 생지옥을 탈출해야겠다고 작심하게 된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피 끓는 청년시대 이제 막 제대를 하고 났을 무렵이었는데, 사무치고 응어리진 통분이 극을 달렸다.
하지만 처지나 신분이란 것이 어디 원한다고 해결되는 사안이던가. 내일을 기대할 수 없는 암담함 가운데서 내가 선결해야 할 최우선적 당위란, 단 한 개의 문이라도 기필코 희망을 걸고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모색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천지가 개벽하듯 혁신적인 시도가 따라야만 되는 중대사였다. 소수 집단이 결정권을 독점하고 있는 공산주의 사회에선 당 간부를 거치지 않고서는 어떤 문제도 무사통과가 어렵기 때문에, 어둠에서 빛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다리를 건너려면 제일 먼저 간부의 눈에 들어야만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었다. 그것은 내가 반드시 넘지 않으면 안 되는 1차 관문이었다.
'말을 타려면 말에서 떨어질 수 있는' 불상사도 있으려니 각오하고, 일을 도모함에 있어 여간만 난처한 상황에도 몸을 사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임했다. 결과가 좋지 않을 경우엔 정직하게 자신의 불찰을 인정하고, 실수라고 판단하면 절대로 변명하려 들지 않았다. 어설픈 변명 따위로 사태가 오히려 더 나쁘게 확대되거나 역효과를 초래할까 겁이 나서, 그저 바람이 거세면 저절로 드러눕는 들판의 잡초같이 매사에 순종하고 복종으로만 일관하였다. 당시엔 '여울로 소금 가마니를 끌고 오라' 해도 군말 없이 끌고 갈 태세로 맹종과 충성으로 무장을 한 상태였으니까….
비빌 언덕이 없는 자에겐 신체가 가장 확실한 자본이란 신념이 내게 있었다. 따라서 성실한 노력을 근로의 밑천으로 삼는다면 인정을 받는 일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라 믿고 견뎠다. 사실 말로서는 아무것도 아닌 이 일이, 자신을 죽여야만 가능한 것이기에 참고 누르는 데 필요한 인내심이 극기에 가까웠다. 그러한 노력이 헛되지 않았던지 어느 순간부터 담당 간부 입에서 오히려 격려의 말이 나왔다. "야아 거, 빡세게 하누만, 허리 좀 펴 가면서 하라." 그 덕분에 막노동만은 면할 수 있게 되었고, 어렵사리 얻은 소(小)공구 공장에서 악착같이 일해가며 밤에는 야간 대학을 다녔다.
2. 야망(野望)
미래를 도모하기 위한 계획의 다음 단계에서 필수적인 것은 노동당 입당 문제가 있었다. 당원이 된다는 것은 내 인생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는 기회이자 보증수표와 같은 것이었기 때문에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길을 걸으면서도 뇌리엔 온통 그 궁리밖에 없었다. '뗏목을 타야겠다는 각오라면 가랑이가 젖을까 봐 염려해서는 안 된다'는 자기점검과 채찍질을 철저하고 엄격하게 하였다.
과정에서의 굴종에 대해선 조금도 회의하거나 자존심 따위로 내 의지가 약화된 적도 없었다. 사람의 일이라 간혹 의지하곤 상관없이 '쓿은 쌀에 뉘 섞이듯' 노동의 결과가 좋지 않게 나타날 적도 있었는데 그땐 "밥만 축내는 인간 벌레는 밟아 없애야 한다"는 등의 오만 모욕을 다 감수해야 했다. 그래도 상대가 상대인지라 언짢은 내색 한 번 못해 보고 매번 속으로만 이를 악물었다. 자칫 바퀴 빠진 수레 꼴로 전락할까 두려운 마음이, 실수하면 안 된다는 경각심으로 이어져 오로지 최선을 다한 끝에, 입당 신청을 한 지 1년이 지날 무렵 마침내 소원하던 노동당원이 될 수 있었다.
갈망하던 당원이 되긴 했으나 당원이 됐다는 것 외에 실질적으로는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들판 바람을 정면으로 맞고 헤매는 들개 같은 처지에서 탈피하려면 반드시 다음 단계로 도약할 수 있는 결정적인 무언가가 필요하였는데, 그 구원의 밧줄이 되어 줄 방법이 딱 하나, 러시아 벌목공에 지원하는 일이었다. 그것을 통해 외국의 문물도 접해보고 돈도 모아서 남부럽지 않게 잘 살고 말겠다는 욕망은 단순한 욕망을 넘어 비할 데 없이 간절한 염원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파견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역시 당 간부이다 보니, 그 난관을 뛰어넘지 않으면 꿈도 꿀 수 없는 또 하나의 난관이 문제로 대두되었다.
내가 저간에 터득한 삶의 한 방편이랄까 수단은, 존재의 진실을 좇아가는 대신 계산된 충성과 얍삽하고 인격 없는 복종 따위로만 점철된 것이었다. 스스로도 조소가 나옴 직한 작태지만 근본부터 별 볼일 없는 자가 기댈 데라곤 자기 몸뚱이만큼 미더운 것도 없는 터라, 따를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면 자발적인 복종이 반항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라 믿고 갈등 없이 그대로 실천하였다. 하나의 수단으로써 복종을 택한 바에는 목적을 위해 현실과 타협하는 행위라고 해서 부끄럽게 여길 것도 없었다. 그저 소망을 이룰 때까지는 혓바닥으로 고름 종기를 핥으래도 마다치 않을 각오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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