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사람도 대구 잘 몰라요 대구 토박이 아니지만 '대구 공부' 강좌 기획했죠"
'동네 석학(碩學)'. 얼핏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낱말의 조합이다. 권위'존엄 같은 딱딱한 추상명사가 어울리는 '석학'이란 단어에 조금은 만만해 보이는 '동네'가 붙으니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왠지 무조건 존경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은 없다. 오히려 골목길에서 마주치면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듯한 친근감이 든다. 내가 모르는 우리 동네 이야기를 술술 풀어내는 그에게 매료될 것만 같지 않은가.
자칭 '삼풍동 석학' 최범순(44) 영남대 일어일문과 교수는 대구에 아무런 연고가 없다. 그럼에도 웬만한 토박이보다 대구를 더 많이 안다. 그리고 그 속에는 바깥만 바라볼 게 아니라 지금 딛고 있는 땅에서 행복을 찾아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가 숨어 있다.
◆'동네 석학' 프로젝트란
'동네 석학'은 최 교수가 지인들과 함께 추진하는 시민 교양 강좌의 이름이다. 정확하게는 '동네 석학이 들려주는 대구 이야기'다. 지난 4월부터 내년 3월까지, 12명의 '대구 전문가'들이 매월 마지막 주 목요일 저녁에 일제강점기를 중심으로 한 주제로 시민들을 만난다. 강연은 한'일 민간 교류 활성화를 위한 사회적 기업인 '대구하루'(대구 중구 서성로)에서 열린다.
"제가 대구를 알아야 학생들을 더 잘 가르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 게 계기였습니다. 일본은 제 전공일뿐더러 한국 근대화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나라이고요. 그런데 의외로 시민들이 대구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아 무료 강좌를 기획하게 됐습니다. 저희의 공부를 기록으로 남기자는 의미도 있고요."
우리 주변에서 알게 모르게 자기만의 연구 주제에 몰두해온 '동네 석학'들의 강연 소재는 다양하다. 임진왜란 때 귀화한 김충선 장군의 후손 이야기부터 북성로 철공소 기술자의 애환까지 두루 짚는다. 오는 8월에는 '삿포로 석학' 마츠이 리에 씨가 '대구에서 태어난 일본인'이란 제목으로 지방의 한일 교류를 소개한다.
최 교수는 다음 달 '1911년 대구 이야기'를 전한다. 경술국치 이듬해에 대구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니 일제가 '조선교육령'(朝鮮敎育令)을 공포하고, 천주교 대구교구'가 설정된 해로 나와 있기는 했지만 그의 대답은 역시나 기자의 무지몽매를 나무라는 듯했다.
"혹시 대구가 어떻게 사과와 섬유의 도시가 된 줄 아십니까? 미와 조테츠라는 일본인이 1911년 1월에 쓴 '대구 일반'이란 책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습니다. 1903년부터 1929년 사망할 때까지 대구에 살았던 그는 이 글에서 '대구 기후는 과수와 양잠에 적합하다'고 밝혔고, 그것이 일본인들의 대구 투자로 이어졌습니다."
◆지역 대학의 글로컬라이제이션
'동네 석학' 프로젝트는 이른바 글로컬라이제이션(glocalization)이다. 세계화(globalization)와 지역화(localization)를 동시에 추구한다는 의미다. 이 행사를 주관하는 '대구읽기모임' 역시 최 교수 주도로 이뤄졌으며, 대구에 사는 일본인도 참여한다.
'대구읽기모임'은 2010년 가을에 발족했다. 대구경북의 근대 역사를 기록한 한국과 일본 문헌을 공부하는 모임이다. 초창기에는 최 교수의 대학 연구실에 모여 일본어 자료를 읽다가 한글 자료로 범위를 넓혔다. 지역의 사회활동가들이 참여하면서 현재 회원은 10명으로 늘어났다.
"세계에는 석학으로 부를 만한 학자들이 참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주 볼 수가 없죠. 또 지역의 문제는 '동네 석학'이 훨씬 자세히 알 수밖에 없습니다. 저희 프로젝트는 외국인, 타 지역 인사들도 참여하지만 대구지역 전문가'활동가의 네트워크라고 보는 게 맞습니다. 이런 분들의 수고로 대구를 아끼는 마음이 전체 공동체로 확산하길 바라고요."
대화는 자연스레 지역 대학의 역할로 이어졌다. 중저음 톤인 그의 목소리도 조금 높아졌다.
"지역 사회와 지역 대학은 서로 상생하는 구조가 되어야 합니다. 대학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느냐는 질문의 답 역시 지역이어야 합니다. 대학은 지역에 대해 가르치고, 학생들을 지역사회에 필요한 인재로 길러내야 합니다. 그런 선순환이 이뤄지지 않고, 서울만 바라본다면 청년 문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일본 대학들이 20여 년 전에 '개성이 빛나는 대학'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대학 개혁을 추진한 게 좋은 본보기가 될 겁니다."
◆대구에서 살아보니
서울에서 각급 학교를 마치고 일본에서 석사'박사 학위를 받은 최 교수는 영남대에 2008년 부임했다. 낯설고 물설었던 대구 생활이 8년째인 셈이다. 그에게 대구는 어떤 곳인지 물어봤다.
"대구는 제가 유학 시절 1년 정도 머물렀던 교토와 무척 비슷한 것 같습니다. 내륙분지, 전통이 오래된 도시, 외부인에게 배타적이란 평가 등이 공통점이죠. 교토가 일본 공산당의 기반인 것처럼 대구가 일제강점기에 '동방의 모스크바'로 불릴 정도로 진보적 성향이 강했던 점도 같고요. 그러나 두 도시는 선입견 탓에 오해받는 부분도 많습니다. 저만 해도 처음에는 대구 생활을 걱정했는데 이런저런 경험들이 쌓이고 나서야 지역의 정서를 조금씩 이해하게 됐거든요."
최 교수는 첫 부임 당시 받았던 '문화 충격'도 들려줬다. "당시만 하더라도 대구에는 유명 가맹점 커피숍이 많지 안았습니다. 대구 토종 브랜드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고요. 백화점도 마찬가지였는데, 오히려 그런 현상이 대구에 흥미를 갖게 된 계기였습니다. 또 안경산업이 발달한 걸 보면서 금방 눈에 띄는 서비스 마인드는 부족해도 깊숙한 어딘가에 장인정신이 살아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대구에 대한 공부가 정말 재미있다는 그는 그래서 '지역문화와 일본'이라는 전공과목을 4년째 열고 있다. 대부분 대구경북 출신인 학생들이 고향에 대해 잘 모르거나 평가절하하는 게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전국 일본 관련 학과 가운데 유일한 지역밀착형 수업이란 게 그의 귀띔이다.
"다행히 반응이 나쁘지는 않습니다, 하하. 수업을 들은 학생들은 어머니, 할머니와 이야기할 소재가 생겼다고 좋아합니다. 책으로나마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 여행을 떠나면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에 대해 훨씬 잘 알게 되고, 전공인 일본에 대한 이해도 역시 높아지거든요. 소외된 공간이었던 북성로 주변이 대구 근대문화 골목투어를 통해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으로 재평가받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최범순 교수는
영주시 풍기읍에서 과수원집 6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최 교수는 초등학교 입학 전 가족과 함께 상경, 서울에서 초'중'고를 마쳤다. 고려대 일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 다니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고베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11년 대구의 근대건물 리노베이션 1호 건물로 문을 연 '카페 삼덕상회'에서 바라본 북성로 풍경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는 그는 "인천, 부산과 달리 대구에 일본 관련 문헌이 많이 보존돼 있지 않아 아쉽다"며 번역 활동을 활발히 하겠다는 포부를 내비쳤다. 교수가 되지 않았다면 연극배우가 됐을지 모르겠다는 그는 취미로 수영을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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