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부는 바람
이황
천만 개 구름 봉우리 하늘 끝에 돌아가고
푸른 물결 푸른 산에 석양이 붉게 타네
후닥닥 지팡이 짚고 높은 곳에 뛰어올라
한바탕 크게 웃을 때 가슴으로 부는 바람!
천말귀운천만봉(天末歸雲千萬峯)
벽파청장석양홍(碧波靑嶂夕陽紅)
휴공급향고대상(携筇急向高臺上)
일소개금만리풍(一笑開襟萬里風)
*원제: 석제등대(夕霽登臺: 저녁에 날이 개어 대에 오르다). *대(臺): 누대(樓臺) 또는 전망이 좋은 높은 곳.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은 세계 유학사에 빛나는 참으로 고매한 학자였지만, 그렇다고 하여 딱딱한 이념의 옷을 입은 무미건조한 분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퇴계는 무려 2천200수가 넘는 엄청난 분량의 시를 남겼던, 흥취가 도도한 시인이었다. 이 시가 바로 퇴계의 그와 같은 면모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아닐까 싶다.
제목으로 보아 하루 종일 비가 내리다가 저녁 무렵에야 비로소 날이 개었던 모양이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종일토록 내린 비로 티끌 하나 없는 저녁 하늘에, 수천수만의 구름 봉우리들이 저 무한 허공으로 돌아가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푸른 물결과 푸른 산봉우리들, 그 온통 푸른 것을 배경으로 하여 석양이 붉게 타오르고 있다. 이제 곧 온 동네의 된장과 고추장을 모두 뒤범벅해 처발라 놓은 듯 황홀한 저녁놀이 서천(西天)을 활활 싸지르게 되리라.
이런 상황에서 그냥 앉아 있을 목석 같은 시인이 어디 있으랴. 퇴계는 용수철이 튀어 오르듯 후닥닥 일어나서 지팡이를 짚고 전망이 좋은 높은 곳을 향하여 아주 다급하게 뛰어 올라간다. 이 대목에서 시적 긴장이 모여 있는 가장 핵심적인 시어(詩語)는 '급(急)'! 이 '급할 급' 자는 그 의미도 물론 다급하지만 그 소리의 뉘앙스도 아주 다급하다. 바로 이 한 글자 속에 잠시 후면 우주 공간에서 영원히 사라져버릴 이 벅찬 풍경을 절대 놓칠 수가 없다는 다급한 마음이 어려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하여 마침내 퇴계는 푸른 물, 푸른 산과 붉은 저녁노을, 그 온통 푸르고 붉은 것들이 마구 뒤범벅이 된 실로 장엄한 우주 쇼를 보면서 한바탕 큰 웃음을 터뜨린다. 대자연 속에 내재되어 있는 우주의 질서를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정감적으로 체득한 사람, 대자연이 주는 그 도저한 감흥에 도취될 줄 아는 사람만이 터뜨릴 수 있는 이른바 '우주적(宇宙的) 유열(愉悅)'의 웃음이다. 시인이 열락의 통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천지간을 향해 가슴을 활짝 열어젖힐 때, 저 만 리 밖 천공(天空)에서 거침없이 불어오는 맛좋은 바람! 온몸이 간지러워 몸살이 날 것 같은 이 엄청 맛있는 바람의 맛을 시인을 제외하고 또 누가 알까. 겨드랑이 털이 알려나 몰라.
댓글 많은 뉴스
박수현 "카톡 검열이 국민 겁박? 음주단속은 일상생활 검열인가"
'카톡 검열' 논란 일파만파…학자들도 일제히 질타
이재명 "가짜뉴스 유포하다 문제 제기하니 반격…민주주의의 적"
"나훈아 78세, 비열한 노인"…문화평론가 김갑수, 작심 비판
판사 출신 주호영 국회부의장 "원칙은 무조건 불구속 수사…강제 수사 당장 접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