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의 전신이었던 한나라당이 차떼기당이란 별명을 얻은 것은 사과 상자에 담은 거액의 돈 때문이었다. 2002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은 대선 자금이라며 40여 개의 사과 상자에 담긴 돈을 차떼기로 받았다가 들통났다. 사과 상자가 뇌물 상자로 둔갑한 원조는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이었다. 1만원권이 최고액이던 시절 사과 상자엔 2억4천만 원의 돈을 담을 수 있었다. 정 회장은 돈이 가득 담긴 사과 상자를 정'관계 인사들에게 뿌리고 다녔다.
사과 상자에 담아야 했던 거액 뇌물은 2009년 5만원권이 발행되며 몸피를 크게 줄였다. 사과 상자 대신 케이크 상자나 음료수 상자 등에 담겨 자연스럽게 전달됐다. 2013년 정치권을 강타했던 '성완종 파문' 당시는 '비타 500' 상자가 입방아에 올랐다.
고액권은 한두 장이면 서민들의 소중한 생활 자금이지만 상자로 모이면 뇌물이나 탈세 스캔들의 주인공이 된다. 한국은행이 발행하는 5만원권이 발행되는 족족 지하로 스며들고 있다. 한은이 발행한 5만원권 화폐 발행 잔액은 70조원에 육박한다. 장수로는 13억9천만 장에 달한다. 하지만 한은이 찍어낸 5만원권 중 되돌아오는 것은 48.2%에 불과하다. 1만원권의 환수율은 110%에 이르고, 5천원권 환수율도 83%를 넘는데 유독 5만원권만 절반도 안 된다. 5천만 국민이 1인당 27장씩, 4인 가구라면 100장 이상은 지녀야 평균인데 지난해 우리나라 가구의 현금 보유액은 30만원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그 많은 5만원권은 다 어디로 갔을까. 각종 수사 속보를 통해 그 편린을 엿볼 수 있다. 비자금 조성 의혹을 받는 신격호 롯데 총괄회장의 비밀 금고에서 비서실장이 빼돌린 뭉칫돈 30억원을 검찰이 찾아냈다. 정운호 스캔들에서도 1억원의 현금이 현직 검사에게 전달됐다는 정황이 드러났다.
이쯤 되면 고액권은 경제에 축복이 아니라 저주다. 서양도 마찬가지다. 고액 화폐는 탈세와 부패로 이어지는 공통점이 있다. 급기야 유럽중앙은행은 2019년부터 500유로 지폐 발행을 중단하기로 했다. 고액권이 서민들의 경제생활에서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 결과다. 우리나라도 고액권 발행 중단을 검토해 볼 만하다. 그 전 단계로 일정 금액 이상의 거래에선 현금 거래를 금지하는 방법도 고려해 볼 수 있다. 대신 전자 거래를 이용하든지 수표 거래를 활성화하는 방법이 있다. 투명 사회를 만들려면 고액권의 저주부터 풀어야 한다.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민주당 "李 유죄 판단 대법관 10명 탄핵하자"…국힘 "이성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