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스카이는 1916년 1월 1일 마침내 황제에 올랐다. 그러나 이는 자충수였다. 최측근들까지 반발하면서 그는 3개월 만에 황제 자리를 포기한 채, 그해 6월 6일 만성피로와 요독증으로 사망했다. 비참한 죽음을 빼면 그는 '억세게 운 좋은 사나이'였다. 시골 향시에 두 번이나 떨어진 망나니였던 그가 출세의 발판을 마련한 것은 조선의 임오군란이었다.
하급관리에 불과했지만, 갑신정변으로 출병한 이홍장과의 만남은 인생을 바꿨다. 청일전쟁 일주일 전 귀국해 현대식 육군 7천 명을 지휘하면서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1900년 의화단사건으로 군 수뇌부들이 죽거나 몰락한 것도 그에게는 행운이었다. 1901년 11월에는 이홍장마저 죽었다. 서태후에 앞서 그와 악연이 있던 광서제가 먼저 죽은 것도 큰 행운이었다.
한때 모든 관직을 박탈당하고 은퇴했지만, 신해혁명 세력의 도움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혁명세력을 무력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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