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창] 유로비전 2016, 신냉전의 신호인가

입력 2016-06-06 18:05:31

경북대(석사)·모스크바 국립사범대(박사) 졸업
경북대(석사)·모스크바 국립사범대(박사) 졸업

유로비전 노래 대회 우승곡 '1944'

스탈린의 크림반도인 추방 사건 표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대립 양상 고조

60년 된 축제 정치적 논쟁으로 얼룩져

매년 5월이 되면 유로비전 대회가 유럽인들의 큰 관심거리로 떠오른다. 유로비전은 유럽 각국과 러시아, 중앙아시아 국가들, 최근에는 호주까지 참가하는 노래 경연 대회로 6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각국 대표가수가 자국의 자존심을 걸고 참여하는 국가대항전 방식으로 진행되기에 유럽 전역에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호주 대표로 우리나라 출신 임다미 씨가 참가해 2위라는 좋은 성적을 얻어 올해엔 한국에서도 전에 없이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올해는 우크라이나 참가자가 우승을 했다. 그런데 그 노랫말과 우승 경위를 두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정치적 논쟁으로까지 비화되었다. "낯선 이들이 당신 집에 와서 모두를 죽여 버리곤 자기들은 죄가 없다고 말하지. 그대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인류는 울고 있네. 당신은 자기를 신이라 생각하지만, 모두들 죽게 마련이야. 내 영혼을 삼켜버리지 마, 우리의 영혼을." 우크라이나 여가수 자말라가 부른 우승곡 '1944'는 이렇듯 꽤나 직설적이고 단순한 노랫말과 곡조로 이루어져 있다. 쉬운 영어 가사와 크림 타타르어로 이루어진 후렴구는 70년 전의 비극적 사건을 말해준다.

노래 제목 1944는 스탈린이 크림반도에 살던 크림 타타르인들을 나치에 협력했다는 죄목으로 중앙아시아로 추방했던 해를 의미한다. 극동에서 강제 이주를 당했던 고려인들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크림 타타르인들이 중앙아시아 이주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수십 년 동안 고향을 떠나 살아가던 이들은 구소련이 해체되던 시기에야 크림반도로 돌아올 수 있었다. 크림 타타르족의 피를 이어받은 자말라는 자기 친할머니가 겪은 사건을 노랫말로 썼다고 한다. 인터뷰에서 그녀는 아직 끝나지 않은 그들의 비극이 2014년에도 반복되었다고 말했는데, 이는 명백히 푸틴에 의한 크림반도의 러시아 합병을 뜻한다.

유로비전에는 정치적인 성향의 노래를 금지한다는 룰이 있기에 러시아 측에서는 우승곡의 당위성을 두고 강력히 항의했다. 시청자 평가 결과 1위였던 러시아 참가자 라자례프가 심사위원단의 평가 이후 3위로 밀려났다는 것에도 의혹을 제기했다. 그러나 스웨덴에서 개최된 유로비전의 주최 측은 자말라의 우승에 별문제가 없다는 반응이다.

최근 군사적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는 러시아와 유럽연합의 대립 양상을 생각해보면, 유로비전의 이러한 갈등은 21세기 '신냉전'의 또 다른 신호탄으로 보인다. 최근 러시아가 서부 국경 지역에 새 부대를 창설하면서 병력을 집중 배치하고 있는 데 대해, 이젠 유럽연합의 일원인 폴란드와 발트 3국, 그리고 우크라이나는 특히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 서유럽 각국은 크림반도 병합 이후 러시아의 고립 정책이 군사적 대립 구도를 더 첨예하게 만들었다면서 불안감을 내비친다. 반대로 러시아 측에서는 나토와 미국이 전에 없이 유럽에 군사력을 증강하고 합동훈련을 실시하는 것을 비난하는 등 러시아와 서구는 냉전 이후 가장 첨예하게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그해 우승자를 배출한 나라에서 다음해 유로비전이 개최되는 전통에 따라, 내년 대회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문화부 장관까지 유럽 각국의 재정적 도움을 요청하고 나섰다. 총리를 지낸 우크라이나의 여성 정치인 티모센코는 지금은 러시아 땅이 된 크림반도에서 유로비전을 치러 이곳이 우크라이나 땅임을 천명하자고 제안했다. 러시아 측은 우크라이나의 어느 도시를 '크림반도'로 개명해서 대회를 개최하는 게 더 빠를 것이라고 일축하면서 불편한 심기를 내보였다.

이러한 긴장된 갈등 속에서 내년 유로비전의 안전한 개최를 위해 나토에 보안을 일임하자는 제안이 나오는 등 유럽인들의 오랜 노래 축제인 유로비전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정치적 논쟁으로 얼룩지고 있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살고 사랑하는 미래를, 가장 행복한 시간을 우리는 만들 수 있었는데!"라는 1944의 후렴구는 노래가 야기한 이런 갈등의 상황에서 더욱 아이러니하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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