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방곡곡 오지 산…한 700여 곳 될까요? 집엔 옷 갈아입으러 오죠. 허허"
영화 '잉글리쉬맨'(1995년 제작)의 무대는 '피농 가루'(Ffynnon Garw)다. 산일 수도 있고, 언덕일 수도 있는 영국 웨일스 지방의 가상공간이다. 산으로 판정하기에는 높이가 조금 모자랐던 이곳은 주민들의 헌신적 노력 덕분에 결국 산으로 인정받는다. 정상에 흙을 돋워 기준을 충족시킨 것이다. 그래서 영화 원제도 '언덕을 올라갔다가 산에서 내려온 영국인'(The Englishman who went up a hill but came down a mountain)이다.
지도측량사인 주인공, 레지날드 안슨(휴 그랜트 분)이 마을 사람들과 합심해 언덕을 산으로 만들었다면 김문암(61) 씨는 산을 산답게 하는 열혈 산꾼이다. 등산객에게 정상임을 알려주는 표지판을 다는 일을 20년 넘게 이어오고 있다. 때로는 무명 산이 그의 유별난 산사랑 덕분에 새 이름을 얻기도 한다.
◆목판 메고 산 오르는 열혈 산꾼
지난달 23일 오후, 김 씨는 경산시 용성면 집에서 길쭉한 목판을 다듬고 있었다. 다음 주에 오를 예정인 상주 대궐터산 정상에 달 표지판이다.
목판은 공업사를 운영하는 산꾼 친구가 3년 전 선물했다. 기계제품이 담겨 있던 나무 상자를 잘라 만들었다고 한다. 김 씨는 여기에다 글씨를 새기고, 철삿줄을 매달 구멍을 뚫고, 페인트칠을 한다.
"한 500개쯤 받았는데 100개 정도밖에 남지 않았네요. 나왕(羅王)이 가장 좋은데, 이건 소나무입니다. 그래도 20년은 넘게 버티죠. 예전에는 조각칼로 글자를 새겼는데 그 돈도 만만치 않게 들어서 요즘은 그냥 문구용 칼을 써요. 허허."
정성스레 글자를 새기는 그의 손마디가 꽤 울퉁불퉁하다. 원래 그렇게 거칠었느냐고 물으니 그는 "내가 이 짓을 왜 시작했는지…."라고 독백처럼 내뱉었다. 손바닥은 굳은살투성이였고, 칼에 베인 상처도 적지 않았다.
"처음에는 산 이름과 정상 높이를 적은 종이 코팅을 나뭇가지에 걸었습니다. 그런데 비바람 탓에 6개월 만에 너덜너덜해지더군요. 그래서 목판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산 정상에서 목판 표지판을 보시면 제 '작품'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의 배낭에는 페인트, 솜, 펜치도 항상 들어 있다. 전국 유명 산마다 있는 표지석의 빛바랜 글씨에 덧칠을 해주고, 등산로 주변에 놓인 덫이나 올무를 제거하기 위해서다. 버려져 있는 쓰레기를 가득 담아 짊어지고 내려오는 것은 그의 '취미'다.
"우리나라 정상 표지석 중에는 글씨에 붉은 칠을 해놓은 게 많습니다. 설악산 대청봉도 그랬고요. 공산주의 국가도 아닌데 말입니다. 관리사무소에 항의도 여러 번 했는데 시정이 되지 않아 아예 제가 검은색 페인트를 갖고 다니며 새로 단장하곤 합니다."
◆전국 700여 곳에 정상 표지판 달아
김 씨가 정상 표지판을 설치한 산은 700여 곳을 헤아린다. 500곳을 넘어선 이후부터는 세지 않아 정확한 숫자는 그 자신도 모른다. 혼자서 오르는 경우도 잦아 10권에 이르는 등산 앨범으로도 모두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표지판을 처음 설치한 것은 1995년 포천 관음산으로 기억합니다. 그전에 혼자 연천 성산에 올랐다가 목숨을 잃을 뻔했던 게 계기였습니다. 짙은 안개와 비로 정상 근처에서 길을 잃었거든요. 꼭대기가 어딘지 알아야 내려가는 길도 쉽게 찾을 텐데, 아무 표지도 없으니 헤맬 수밖에요. 요즘은 각 지역 산악회나 지방자치단체가 표지판 달기에 동참하고 있어 참 다행입니다."
그의 발길은 늘 방방곡곡에 꼭꼭 숨어 있는 오지 산으로 향한다. 이름난 산에는 이미 정상을 알리는 큼지막한 표지석이 세워져 있어서다. 그는 수도권 산에 갈 때는 주로 기차'버스를 이용하고, 대구 근교 산에 갈 때는 승용차를 주로 탄다.
"표지판을 설치할 산을 고르는 기준이 딱히 있는 건 아닙니다. 지인들의 조언도 듣고 인터넷도 찾아봅니다. 2014년에는 대마도에도 갔습니다. 섬에서 가장 높은 시라다케산 정상에다 한자로 '백악'(白嶽)이라고 쓴 표지판을 달아두고 왔죠. 하도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서…."
환갑의 나이에도 바위처럼 단단한 체구의 그는 표지판을 준비할 때면 꼼꼼해진다. 정확한 높이를 알아보는 일이다. 지도는 물론 산림청과 국토지리정보원, 산이 있는 지방자치단체의 홈페이지를 샅샅이 뒤지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제 이름이 글월 문(文) 바위 암(巖)입니다. 이름대로 산다는 옛말처럼, 표지판 없이 오른 산에선 이따금 돌에 해발고도와 산 이름을 새겨넣고 내려오기도 해요. 많은 등산객이 볼 표지판에 거짓이 섞여 있어선 안 되죠."
◆"누군가는 해야 할 일"
'1만 시간의 법칙'이란 경영학 용어가 있다. 영국 저널리스트이자 경영사상가인 말콤 글래드웰이 저서 '아웃라이어'에서 처음 썼다. 어떤 분야든 1만 시간을 투자하면 그 분야에 통달한 장인이 된다는 이야기다.
김 씨가 산에서 보낸 시간은 적어도 수만 시간은 된다. 지금까지 1만 회 이상 등산에 나섰기 때문이다. "주로 산에서 살고, 집에는 옷 갈아입으러 온다"는 게 그의 삶이다.
그러다 보니 '산 박사'인 그가 이름을 지어준 산도 있다. 경주에 있는 무장봉이 대표적이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와 드라마 '선덕여왕' 촬영지로도 잘 알려진 곳이다.
"영화 속에 어디서 본 듯한 풍경이 나오더군요. 물어물어 확인했더니 무장봉입디다. 그런데 그 산이 이름이 없었어요. 그래서 제가 페인트 들고 가서 작은 돌에 무장산이라고 새겨놓았는데,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그걸 또 어떻게 알고 연락을 해왔어요. 무슨 근거로 산 이름을 지었느냐기에 무장사 터가 있어서 그렇게 했다고 알려줬습니다. 지금은 동대봉산 무장봉으로 불리는데 억새가 장관입니다. 한 번 꼭 가보세요."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이어서 표지판을 단다는 그는 대구시도 이 일에 관심을 두길 희망했다. 시민들이 즐겨 찾는 산의 정상에 아직 표지석이 없어서다. 충남 출신이지만 대구에서 30년 넘게 산 까닭에 그는 대구를 제2의 고향이라 생각한다.
"팔공산과 비슬산이 대구와 경북에 걸쳐 있는 점을 고려하면 대구의 산은 앞산'대덕산'산성산 등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런저런 이유로 아직 표지석을 세우지 않고 있어요. 표지석은 누군가에게는 기념 촬영 배경에 그치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조난을 막아줄 '등대'인데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셈이죠."
◆김문암 씨는?
충남 논산의 계룡산 자락에서 태어난 김문암 씨는 타고난 산꾼이다. 평생을 바친 군 생활 중에는 산에 가고 싶어서 당직사관을 일부러 자청할 정도였다. 휴식일인 이튿날에 등산할 수 있어서였다. 김 씨는 "현역 때는 매월 10차례 정도 산에 올랐고, 제대 후에는 그 두 배쯤 다닌 것 같다"며 "요즘도 주 3회는 산악회 활동을 하고, 일정이 없는 날에도 리듬을 잃지 않으려고 집앞 용산을 오른다"고 귀띔했다.
김 씨는 현재 대구 '드림 산악회'에서 초보 등산객을 위한 가이드로 활동하고 있다. 1만 개가 넘는 국내 산봉우리 가운데 400m 이상은 모두 다 올라보고 싶다는 게 그의 '버킷 리스트'다.
◆김문암 씨가 말하는 "산에 가시거든…"
등산복만 150벌이 있다는 김 씨의 '등산 예찬'은 끝이 없었다. 애주가에다 애연가여서 산에 오르지 않았으면 벌써 죽었을지도 모른다고도 했다. 보약 먹을 돈이 있으면 산에 가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산에 관해서라면 '프로'인 그는 '좋은 산을 소개해달라'는 부탁을 싫어한다. "명산은 없다"고 잘라 말한다. "정상에 올라서 보람을 느끼면 그게 바로 명산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경관이 빼어난 산이라도 힘들기만 하면 악산에 불과하고요. 자신만의 명산은 스스로 느끼는 겁니다."
보통사람이 3시간 걸리는 산행을 1시간 30분 만에 해내는 김 씨는 '사부작사부작 정신'을 강조했다. 자기 체력에 맞게 무리하지 말라는 이야기였다. 등산 중에도 페이스를 유지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인생도 너무 서두르면 뜻하지 않은 난관에 부닥치지 않습니까? 등산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연을 음미하면서, 사색을 즐기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다 보면 어느새 정상입니다. 평범한 가정주부라도 허벅지 힘을 차근차근 기르면 6개월 뒤에는 백두대간 종주를 할 수 있어요. 단, 산에 오를 때는 꼭 양손에 스틱을 챙겨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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