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준희의 문학노트] 우리가 영웅담을 조심해야 하는 이유? -윤태호의 '미생'

입력 2016-05-25 19:09:11

수많은 걸음들이 같은 길을 지난다. 내가 누군지 누가 누군지 알 필요도 없는 공간을 지나간다. 큰 길가에 커다랗게 자리한 대기업과 그 옆 골목에 밀집한 상가들, 그곳에 입주한 작고 작은 회사들. 전체 노동자의 12.3%를 차지하는 이들이 커다란 대기업 현관을 향할 때, 대기업의 1천 배에 육박하는 중소기업을 향해 전체 노동자의 87%에 달하는 종사자가 골목으로 들어선다.(윤태호의 '미생 10권' 중에서)

1970년대 말, 나에게 책이라는 존재가 주는 즐거움을 깨닫게 만든 아주 사소한 계기가 있었다. 학교 도서관이 아직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시대였고, 학교에 갔다가 집에 돌아오면 나를 기다리는 건 산과 들이었다. 부모님들을 도와 농사일을 해야 했고, 소가 먹을 풀을 들에서 뜯어 와야 했고, 산에 가서 땔감을 지고 와야 했다. 언감생심 책을 읽다니. 그런 시대가 아니었다. 교과서를 제외하고 만날 수 있는 책은 거의 없었고, 몇몇 친구들이 가지고 다녔던 표준전과가 책의 전부였다. 그때 선생님의 추천으로 전국고전읽기대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매일 밤늦게, 또는 합숙까지 하면서 대회를 준비했다. 중요한 건 그때 무엇을 공부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회가 끝나는 날, 지도 선생님께서 선물로 준 계림문고 책 한 권. 당시에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디자인이 날렵했고 나는 그 책 안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책은 월터 스코트의 '아이반호우'. 아마 수백 번은 읽었을 게다. 아이반호우와 레베카의 사랑도 좋았지만 '이름 없는 기사'라는 이름으로 악인들을 이겨나가는 아이반호우의 영웅담에 끌렸다. 그때부터 용돈이 생기면 무조건 계림문고를 사서 읽었고, 지금도 기억나는 책은 라파엘 사바티니의 '스카라무슈'다.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스카라무슈'라는 이름으로 승리를 쟁취하는 앙드레의 삶은 통쾌했다. 대학원에서 고전소설에 나오는 한국형 영웅담에 빠져 있을 때까지 오랜 시간 아이반호우와 앙드레는 내 사고를 지배했다.

문제는 지금은 영웅의 시대가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아이반호우나 앙드레처럼 어려운 환경을 이기고 승리하는 이야기를 현실에서 찾기는 어렵다. 수많은 미생들로 구성된 사회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드라마로까지 만들어진 '미생' 9권이 이제 10권으로 다시 시작되었다. '미생'은 '지금, 여기'의 이야기다. 사회적 표현은 부재(不在)나 결핍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이다. 문학이 숨겨진 욕망의 드러냄이라면 그 내면에는 부재나 결핍이 존재하니까. 요즘에는 영웅이 너무 많다. 너도나도 영웅인 시대는 이미 영웅의 시대가 아니다. 어느 시대에도 영웅은 존재했지만 그 영웅 이면에는 수많은 미생들의 희생이 존재했다. 만리장성과 아방궁으로 대변되는 진시황의 화려함 이면에는 연간 수십만 명의 노예들이 존재했다. 민초들은 대부분 견디며 산다. 바람에도, 눈과 비에도 견딘다. 그렇다. 견딘다는 표현이 그들에게 가장 적절한 표현이다. 하지만 민초도 견딤의 임계점을 넘으면 결국은 폭발한다. 먹고, 입고, 잠자는 최소한의 안정조차 파괴되는 순간 민초는 일어난다. 역사가 그것을 증명한다. 하지만 갑자기 일어나는 경우는 없다. 반드시 그것을 예고하는 현상이 존재한다. 문학의 역할이 그런 것이다. 문학은 잠수함의 토끼처럼 시대의 변화와 민초의 목소리를 조금 앞서 보여줌으로써 역사의 발전을 돕는다. 지금이 바로 그 시간이다.

13%와 87%. 다시 말하면 우리는, 그리고 우리 아이들은 대부분 87%로 살아간다. 미생으로 살아간다는 말이다. OECD 행복지수가 최하위로 나오는 건 당연하다. 87%가 행복하지 않은데 지수가 높을 수가 없지 않은가. 87%가 행복할 수 있는 삶을 설계한다면 당연히 행복지수는 높아진다. 정책의 방향은 명확하다. 영웅을 기다리기보다 행복한 미생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2016년이 보여주는 시대정신이다.

강연에 초대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윤태호 작가와 연락을 취했지만 쉽지 않았다. 유명해져버린 작가는 이미 미생이 아니었던 셈이다. 우리 사회의 이면에 담긴 아픔들을 드러내는 이야기를 창조하고, 드라마로 영화로 확대되는 윤태호 현상. 바람이 있다면 이미 미생이 아닌 윤태호 작가가 수많은 미생들이 걸어가는 그 길에 머물면서 더불어 걸어가 주었으면 하는 것. 생각해보라. 개천에서 난 용들이 개천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를. 대부분 용이 되면 개천을 잊어버린다. 아니, 무시한다. 우리가 영웅담을 조심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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