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꽃-제1회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 가작

입력 2016-05-25 19:11:01

염전 바닥에 바닷물이 고여 있다. 스무 번 이상 증발지를 거쳐 결정지에 와서야 소금될 자격을 얻는다. 염천의 쪼임과 해풍으로 제 몸에서 해종일 물을 빼느라 뜨거움을 가슴에 안고 뒤척인다. 해 질 녘이 되면 날마다 하얀 꽃이 피어난다. 반짝이는 별꽃 같기도 하고 투명한 살얼음의 소금꽃이 맺힌다. 심심산골의 개울물에서부터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 흙탕물이 된 홍수까지 너그러이 다 받아들이는 바닷물이 제 몸을 졸이고 졸여서 남긴 것, 그것이 소금이다.

시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왔다. 처녀의 몸으로 재취 자리로 시집을 오신 어머님은 어린 전처 자식을 둘이나 건사해야 했다. 조선 유교 사회 율법의 총집합소인 그곳은 양반 문화와 제례, 상례의 예법을 목숨처럼 여기는 곳이었다. 아들 없이 세상을 떠난 맏동서를 대신해서 사대봉제사를 모셨으며 지병으로 인해 소박맞고 친정으로 내쳐진 정신 줄 놓은 질녀를 돌봤다. 그 일은 염부가 날마다 증발지에 물을 꺾는 힘겨운 노동이었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에서 마냥 기다린다고 소금이 되지 않듯 수삼 년, 온갖 질고를 함께 안고 숨질 때까지 수발을 도맡아 가며 소금이 되기를 자처하셨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빨간 코트의 어린 여자애가 떠오른다. '한 생명을 구하는 일은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는 마음이었으리라. 자의의 삶을 추구할 수 있는 길은 없었고, 인습에 파묻혀 체통이라는 방패로 몸을 도사려야 했다. 자신의 십자가를 알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처한 환경을 섬기듯 하셨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복의 근원임을 일깨우며 자식들을 차별 없이 양육하셨다. 시골에 사는 친인척의 학생들에겐 잠자리와 거처를 군소리 없이 제공하고, 식량이나 긴요한 물건을 구하러 오는 사람에겐 기꺼이 내주시곤 했다. 그렇다고 넉넉해서는 더더욱 아니었다. 다 같이 살기 어려운 시절에 조금 더 갖추고 사신 듯했다. 이게 다 하늘창고에 복 쌓는 일이라 되뇌면서 수행자의 모습으로 사셨다.

"자네 어머님이 우리 집에 오시면 옷장을 죄다 뒤지고 무엇이 없어졌다고 해."

시외숙모님의 말씀으로 얼마 전부터 보인 이상한 행동징후가 이해되었다. 그때부터 어머님은 치매가 시작되고 있었나 보다. 아침 식탁에 앉으면 예전에 있었던 일을 끝도 없이 말씀하시고 출근해야 하는 아들과 며느리를 붙잡아 앉혀 놓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했다. 했던 말씀을 또 하시는가 하면 소변을 조절하지 못해 옷이 늘 지려 있었다.

효심이 깊은 아들들은 용하다는 병원과 한의원을 수소문해서 치료코자 했다. 간절한 염원과 기도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병원에서 주는 약은 아무 효과가 없었다. 그 병은 애당초 낫는 병이 아니었다. 단아하시던 몸매는 말라비틀어진 고목에 낙엽 몇 개가 매달려 있는 형상이었다. 원인을 궁금해하는 가족에게 병원 의사는 "나이 들고 외로우면 생길 수 있는 병입니다"라고 무심하게 답한다. 구구한 설명이 귀찮아 대충 얼버무리는 느낌이 든다. 시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십여 년 동안 많이 허하고 외로우셨나 보다. 하기야 효심 깊은 열 자식보다 악처 하나가 더 낫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연세가 들어도 배우자 상실은 정신적 충격이 큰가 보다. '상실의 가장 확실한 치유는 시간이다'라고 하는데…, 아들 바라기인 어머님의 일탈로 인해 남편의 이마에는 안개가 끼고 어깨 위는 수심이 눈처럼 쌓였다.

남편은 어머님 방에서 기거하기 시작했다. 어머님이 일어나시면 한밤중에라도 일어나고, 화장실을 가면 같이 일어나 부축해서 볼일을 거들어 드리며 조석으로 시중을 들었다. 시간이 나는 대로 어머님을 대동해서 나들이도 해드리고 끝없는 말동무도 돼드리며 당신 뜻에 맞춰 생활했다. 사람을 못 알아보고 헛소리를 하기 시작해도 남편만은 알아보고 찾았다.

상태가 악화되자 시골 시동생네로 옮겨가시게 됐다. 거기에선 좀 좋아지시는 듯하다가 돌보는 사람의 방심을 틈타 밖으로 나가서는 길을 잃어 다른 사람이 모셔오기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시골이니 가능했다. 밖으로 나다니다가 다리며 팔이며 얼굴에 생채기를 입고 간신히 타인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오시곤 했다. 가끔 길 위 현수막에 '사람을 찾습니다' 하고 길 잃어버린 치매 노인의 신상정보가 떠 있는 것을 볼 때는 남의 일인 양 여겼다. 그러기를 삼사 년, 아들들의 애끊는 통곡을 뒤로하고 지친 영혼은 쉼을 택했다. 온갖 시름과 오욕으로 두루마리 한 세상 등짐을 내려놓으셨다.

호상이라 여겼던 초상집에 진짜 초상 이상의 문제가 불거졌다. 장례 절차가 끝나고 제사 문제가 나왔다. "우리 생모도 아니고 당신 자식이 있으니 제사는 못 모시겠다."

평소 보아 온 손위 동서의 모습이 아니다. 따뜻해 보이던 얼굴은 돌변해서 얼음 같은 차가움을 쏟아 내고 허한 가슴으로 앉아 있는 가족들에게 청천벽력 같은 통보를 했다. 돌아가신 어머님의 삶은 많은 사람이 칭송하는 소금꽃의 일생이었으나 소낙비를 맞는 낭패감이었다. 염전 밭의 소금은 내리는 비로 인해 지금까지 한 고난의 땀방울은 무효였다. 유교 문화의 핵심인 효사상의 일환인 제사 모시는 일은 살아계신 부모 모시는 이상의 정성을 들이는 것이 시댁 가풍이었다.

동서의 행위는 윤리를 저버리는 고약함이다. 한 번도 의심해 보지 않은 당연한 순리로 믿고 있었던 일이다. 어머님 생전에는 말수가 적고 조용하던 호랑이의 감춰진 발톱이 드러나고 있다. 어머님이 당신 소생의 며느리한테는 호되게 하셔도 전처 자식 며느리에겐 말조심, 몸조심을 하며 몸을 사리셨다. 중국 속담에 '차가운 차와 찬밥은 그래도 참을 수 있으나 차가운 말은 도저히 참기 어렵다'고 했다. 그러나 좌중에 앉은 시숙들과 시동생은 모두 전당 잡은 촛대다. 입은 있어도 입이 없고 심장을 내리누르는 바윗덩이 같은 침묵만 있었다. 함께 탔던 배는 꺼지고 구명대는 없었다.

어머님의 염전 벌판은 팔십 평생 이상을 제 몸의 물을 빼는 갇힌 바닷물의 고단함이었으나 소금으로 결정이 맺히지 못했다. 하지만 그 인생 자체는 소금꽃의 메시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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