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의 생각] 와룡산 산행 유감

입력 2016-05-18 16:38:18

새방골 뒤쪽에 자리 잡은 와룡산은 대구 성서 주민들의 쉼터 같은 곳이다. 누운 용(臥龍)이라는 이름처럼 고도가 300m도 채 되지 않은 야산급이다. 도심 산으로는 드물게 서구, 달서구, 달성군 등 세 지자체 경계에 걸쳐져 있어 산의 영역은 거의 '광역급'을 자랑한다.

필자가 와룡산에 오르기 시작한 것은 약 20년 전. 근처에 아파트를 분양받아 이사를 오면서부터다.

지금은 데크가 놓이고 계단을 정비해 등산로의 외형을 갖추었지만 초기엔 주등산로 빼고는 오솔길, 소로(小路)가 전부였다. 어쩌다 아침 일찍 산에 나서면 길옆 수풀 이슬에 신발이 흠뻑 젖을 정도였다. 등산 도중 오소리, 고라니, 멧돼지와 마주쳐 당황하던 일도 추억이 돼버렸다.

10년 전쯤 산의 동쪽(정상에서 용미봉) 등산로에 큰 변화가 생겼다. 잡목으로 우거진 오솔길엔 넓은 길이 나고 무덤과 잡풀로 뒤덮인 서대구IC 쪽 등산로가 산뜻하게 정비되었다. 서구청에서 등산로 정비에 나서면서 산의 동쪽 길이 활짝 열린 것이다. 그 덕분에 용두봉에서 용미봉에 이르는 종주코스가 시원하게 뚫리게 되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새로 난 길을 걸으면서 이상한 점이 하나씩 눈에 띄기 시작했다.

첫 번째 등산객들을 어리둥절하게 한 건 등산로 지도였다. 웬일인지 서구청 관할 등산로엔 달서구 쪽 등산로(용머리봉)가 아예 빠져 있었다. 전체 와룡산 중 서구 행정구역만 똑 떼어 지도를 만든 것이다.

이 때문에 서재 쪽에서 종주코스로 넘어온 등산객들이 적잖이 당황하게 된다. 지도대로라면 달서구 쪽 등산로는 '가상의 공간'이나 정체불명의 영역이 되기 때문이다. 자연에 인위적으로 금을 긋고 산을 갈라놓은 발상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황당한 점은 또 있다. 갑자기 바뀌어버린 봉우리 이름들이다. 어느샌가 등산로엔 서구1봉, 2봉, 3봉 같은 낯선 표지판이 걸려 있었다. 그것도 어색하게 할배봉, 손자봉이라는 부제까지 달아 가면서.

기존 용꼬리봉(龍尾峰)이나 가르뱅이 뒷산이라는 운치 있는 이름이 있음에도 구청에서 행정식으로 작명을 해놓으니 억지스럽고 공감도 잘 가지 않는다. 솔직히 등산객들 입장에서 산은 자체로 오르며 즐기는 대상일 뿐 지금 오르는 산이 어느 지자체의 영역인지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물론 서구청에서 와룡산에 쏟아부은 노력을 폄하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서구청 관내에는 큰 산이 없어 와룡산에 대한 애정이 대단하고 예산도 많이 투입했다고 들었다. 고압송전로, 공동묘지에 막혀 있던 용미봉 코스가 활성화된 것은 전적으로 서구의 노력 덕이다.

또 금호강변에 영산홍 군락지를 조성해 봄마다 산상화원을 연출하게 된 것도 와룡산을 아끼는 시민 입장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싶다. 그러나 와룡산을 쪼개 경계를 나눈 '반쪽 행정' 때문에 이런 좋은 취지들이 퇴색해버린 것 같아 안타깝다.

서구청은 이런 소모적 행정 대신 세 지자체와 협력해 와룡산 종주 능선이라도 개발하는 게 훨씬 나았을 것이다. 행정에 볼모로 잡힌 와룡산을 이제 시민들에게 돌려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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