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가피·영험 있다" 불교계 대표적 기도도량 비슬산 대견사

입력 2016-05-11 22:30:02

일제에 의해 강제 폐사된 후 100여 년 만에 복원, 중창된 대견사 전경.
일제에 의해 강제 폐사된 후 100여 년 만에 복원, 중창된 대견사 전경.
비슬산 대견사 동굴대좌에서 바라본 3층 석탑.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42호로 지정됐다. 대견사 제공
비슬산 대견사 동굴대좌에서 바라본 3층 석탑.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42호로 지정됐다. 대견사 제공

비슬산 대견사가 복원, 중창 2년째를 맞고 있다. 대견사는 중창 이후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의 가피(加被)와 영험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일약 전국적인 기도 도량으로 부각되고 있다.

삼국유사의 일연 스님이 22년 동안 주석(駐錫'승려가 머무름)하고, 일제강점기에 강제 폐사된 비슬산 대견사는 지난 2014년 3월 중창됐다. 특히 대견사는 현재 전국 3천200여 곳의 폐사지 가운데 중창 제1호 사찰로 기록돼 의미를 더하고 있다.

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와 달성군은 대구 달성군 유가면 용리에 위치한 대견사 부지 3천633㎡에 대웅전(73㎡)을 비롯해 대견보궁'선당'산신각'종무소'요사채 등의 건물을 폐사 당시의 원형대로 복원했다. 현재는 일주문과 종루 등의 불사를 진행 중이다.

대견사는 비슬산 대견봉의 정상부 남쪽에 터를 잡았다. 창건 시기는 신라 헌덕왕 때로 여겨진다. 절 뒤로는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다. 남쪽 눈앞으로는 시야가 탁 트여 산악과 평야, 굽이치는 낙동강을 전망할 수 있는 명당 중의 명당이다.

▶대견사의 역사

대견사의 첫 이름은 보당암(寶幢庵)으로 추정된다. 보당암은 일연 스님이 22세 때 승과에 장원급제한 후 초임지로 주석한 곳이다.

지난 2012년 진행된 대견사 발굴조사에서 '辛亥五月◯'이라는 문자가 새겨진 암막새가 출토됐다. '辛亥'년의 간지에 해당하는 연도는 1371년(고려 공민왕 20년)과 1431년(조선 세종 13년)이다. 암막새의 평면형태 등을 보았을 때 고려말∼조선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미뤄볼 때 '辛亥'년은 1371년으로 대견사가 고려 공민왕 때 중수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조선 초기에 간행된 '동문선' 권111, 소에 실린 이첨의 글 '보당암중창법화삼매참소'를 통해 보당암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중창 추정시기는 1402년(태종 2년)이며 사찰 명칭 또한 대견사로 바뀐 것으로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도 대견사가 등장한다. 1416년(태종 16년) 2월 29일과 1423년(세종 5년) 11월 29일 이 절에 있던 장육관음상이 땀을 흘려 조정에 보고된 기록이 나온다. 이후 대견사는 1481년(성종 12년)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의 현풍현 불우조에 수록됐다. 특히 이 기록에는 '대견사는 남쪽 모퉁이에 있으며, 신라 헌덕왕 때 창건됐다'고 명시돼 있다.

지난 2002년 영남문화재연구원의 시굴조사 과정에서 추정 건물지 6동과 암'수막새 파편들이 확인됐다. 특히 출토된 암막새에서 '大見寺'의 명문이 나와 그동안 전설로만 전해오던 대견사의 정확한 명칭을 알게 됐다. 이때 수습된 기와 조각에 남아 있는 '만력 39년(1611년), 숭정 6년(1633년)' 등의 명문으로 봐 여러 차례 중수'중창 됐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전소된 대견사는 광해군과 인조대에 중창돼 전성기를 맞이했으나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사세(寺勢)를 유지하지 못했다.

1871년 편찬된 '현풍현읍지'에 "대견사는 비슬산 아래 있는데 지금은 폐허가 됐다. 신라 헌덕왕이 창건한 것으로 9층 석탑이 있다. 만력 임진년(1592년) 절이 기울고 무너졌다. 상량문 1책을 얻었는데 산세가 대마도를 끌어당기는 형세로 이절을 창건해 진압했다고 기록돼 있다. 김성일이 초유사(招諭使)가 돼 이를 얻어 보았으나 그 후에 잃어버렸다"고 수록돼 있다.

이후 대견사는 영친왕 즉위와 대한제국 축원을 위해 1900년 중수됐으며 영친왕이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떠난 뒤인 1908년 몰락했고 1917년 일제에 의해 강제 폐사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911년 조선총독부 내무부 지방국에서 발간한 '조선사찰사료' 제1권 경상도 대견사조에는 "대견사=영친왕을 축원하기 위한 위축(位祝)을 광무 4년 경자년(1900년)에 이재인이 신설했다. 융희 2년 무신년(1908년) 위축을 폐지함과 함께 몰락했다. 융희 3년 기유년(1909년)에 전폐하게 됐고, 현재는 단지 대적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대견사의 복원과 중창

지난 2010년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김문오 달성군수는 취임 일성으로 "폐사된 대견사를 복원, 중창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대견사 중창은 과거 민선시절 때부터 부임해 오는 군수들마다 거의 한 번씩은 시도해 본 사업이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했고, 이후 민선 군수 때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달성을 거쳐간 군수들이 대견사 중창에 실패한 가장 큰 걸림돌은 '문화재보호법'이었다. 이 법은 문화재의 보존관리 및 활용에 있어 '원형유지'를 기본원칙으로 하기 때문이다.

김문오 군수가 진두지휘하는 달성군의 관련부서는 문화재보호법이 아닌 '건축법'으로 접근해 중창의 돌파구를 찾았다. 달성군은 "대견사터의 삼층석탑 등 문화재에 손을 대지 않고 원형대로 보존하는 대신에 폐사돼 사라진 옛 사찰의 건축물을 복원하겠다"는 명분으로 문화재청의 대응에 맞서게 된다.

오랜 진통 끝에 문화재청으로부터 허가(현상변경)가 났다. 달성군은 곧바로 고건축전문가를 중심으로 대학의 건축학과 교수, 지역 유지, 군의회 의원 등 15명으로 구성된 '대견사 중창추진위원회'를 발족시키게 된다.

달성군이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 팔공총림 동화사에 이 같은 사실을 알리자 동화사 측은 반색하며 대견사 중창에 합류하게 된다. 조계종은 중앙종단 차원에서 자승 총무원장이 직접 대견사를 방문할 정도로 높은 관심을 갖고 접근해왔다.

대견사의 터는 달성군 소유로 돼 있다. 이 때문에 대견사 중창 업무를 달성군이 주축이 돼 이끌어 나갔다. 달성군과 동화사는 대견사 중창에 소요되는 전체 사업비를 충당키로 하는 등의 내용이 담긴 '비슬산 대견사 중창을 위한 협약(MOU)'을 체결하게 된다.

드디어 중창위원회는 대견사를 어떻게 중창할 것인가에 대해 설계공모에 나섰다. 총 50억원의 사업예산으로 대웅전 64.17㎡, 선당 58.32㎡, 종무소 58.32㎡, 산신각 5.04㎡ 등의 규모로 짓겠다는 계획을 최종 확정했다.

보통 절간에서는 '절 짓는 사업은 절로 절로 이뤄진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대견사 중창사업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중창사업의 첫 단계인 건축허가 신청을 위한 '산지전용허가' 과정부터 막히기 시작했다. 산지전용허가 서류를 3일만 늦춰 제출했더라면 당시 관련법 개정으로 건축허가가 어려울 뻔했다.

게다가 옛 대견사터에 대한 두 차례의 발굴, 시대를 달리하는 건물지(8개동)의 유구 보호, 발굴 유적물의 보존대책, 가람배치와 건축주 변경 문제 등으로 문화재청과 대구시문화재위원회 현상변경 심의에서 3차례나 유보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대견사는 착공한 지 1년 만인 지난 2014년 3월 1일 중창에 따른 개산식을 열었다. 달성군과 조계종은 대견사의 산문을 여는 날을 일제에 항거해 독립만세를 외쳤던 3'1절로 잡아 '강제 폐사'의 의미를 되새겼다. 현재 비슬산 대견사는 주지 각운 스님과 법휘 총무스님이 한국불교계의 대표적 기도도량으로 기틀을 다져나가고 있다.

※도움글=삼국유사 찬술의 사적고찰(문경현'전 경북대 교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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