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태극단 학생독립운동 추념식을 다녀와서

입력 2016-05-11 19:06:35

아침 해 빛나는 이 푸른 언덕에서 맥맥히 자라온 겨레의 얼이여. 반만년 깊은 뿌리 비바람에 꺾일쏘냐, 일찍이 서라벌에 꽃피어 화랑이었고, 여기 새로운 횃불 되어 타오르니 그 이름 태극단(太極團)이다. 1942년 왜적의 모진 손톱이 겨레의 숨결마저 끊으려 할 즈음, 바로 이 배움터에서 항거의 칼을 잡고 일어선 봉오리 이상호, 서상교, 김상길, 김정진, 이준윤, 윤삼룡, 이태원, 정광해, 정완진 등이 중심 되어 뭉쳤으니, 뜻은 오직 조국의 독립에 있었고, 길은 다만 죽음을 각오할 따름이었다. 슬기로운 계획과 조짐, 날카로운 이론과 방법, 매운 그 기백(氣魄)이 왜적의 간담을 찔렀다. 군사학'과학'체육 공부에 더 힘썼으니 그 장한 힘은 겨레의 심장을 지켰다. 1943년 5월 9일 대구 앞산에서 큰 모임을 가지고, 가꾸어온 지난날을 가다듬고 싸워서 나갈 앞길을 굳게 다짐하였으니, 젊은 서슬이 삼천리를 덮었고 의로운 기개는 역사의 기둥이 되었다.

아깝다. 큰 깃발을 펴기도 전에 원수에게 탄로되어 갸륵한 새순은 무참히 발리고 펴진 날개 원통히 찢기었지만, 매운 넋은 더욱 힘차게 소리쳐 티 없이 맑은 피가 방울방울 겨레의 가쁜 숨결을 살리었다. 여기 돌을 깎아 자랑스러운 그 이름을 새긴다. 고구려의 맥박이 이곳에 뛰고 신라의 목소리가 여기서 울린다. 겨레의 아들'딸들이 고개 숙여 우러러 받들지니 태극단 그 이름 길이길이 이 땅에서 푸르리라.

일제의 침략기 가운데 가장 극렬했던 민족 탄압과 수탈이 자행된 1940년대에 어린 학생이 주동이 되어 조직적으로 결성된 태극단 학생독립운동은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1943년 5월 불행하게도 단원 한 명의 밀고로 전모가 탄로 나 실패로 끝이 났지만 악랄한 일본인들은 민중의 봉기를 우려해 그 사실을 극비에 부쳤고 광복 후에는 남북 분단, 6'25전쟁, 4'9 학생의거 등 국내외 사정으로 태극단의 진가가 묻혀 왔다. 당시 이상호 단장 등 4명은 모진 고문으로 순국하였고, 이상호 단장의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1963년 제3공화국의 등장으로 반민족적 행위자 청산과 독립운동 유공자 포상의 당위성으로 지사들에 대한 건국공로훈장 및 표창이 수훈됨으로써 어린 학생들의 피어린 항일 투쟁사가 겨우 빛을 보게 되었으나 그 실질적 평가는 아직까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태극단 학생독립운동은 일제 말기의 시대적 상황은 물론 신명을 바친 결사 동기와 원대한 행동강령, 체계적인 조직에서 보듯이 그 어느 운동보다도 의의가 뛰어나다.

따라서 단순한 항일학생운동의 범위를 넘어서는 항일독립운동사의 맥락에서 재조명되고 범국민적, 범국가적 차원에서 숭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흡하지만 2000년 초에 대구상원고등학교 총동창회에서 태극단 학생독립운동 정립 기념사업을 발원하여 현재의 위치(대구상원고등학교 후문 태극단 학생독립운동 기념공원)에 기념탑과 기념공원을 조성하였다.

이제 자료집 발간과 기념탑 및 기념공원을 건립한 지도 10여 년이 지났다. 태극단 순국선열 및 애국지사님들의 고귀한 뜻을 기리고 그 정신을 후손에게 계승하기 위한 새로운 차원의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대구상원고 5만여 동문과 태극단 애국지사 유가족들은 후학들에게 배움의 귀감이 될 수 있도록 대구시가 매년 5월 9일을 태극단 학생독립운동 기념일로 지정해 주기를 간절하게 요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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