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송기의 우리말 이야기] 박제(剝製)가 된 천재

입력 2016-05-08 19:11:44

'박제(剝製)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

육신이 흐느적흐느적하도록 피로했을 때만 정신이 은화(銀貨)처럼 맑소. 니코틴이 내 횟배 앓는 뱃속으로 스미면 머릿속에 으레 백지가 준비되는 법이오. 그 위에다 나는 위트와 패러독스를 바둑 포석처럼 늘어놓소. 가증할 상식의 병이오.

위의 글은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학창시절 한 번은 읽어 보았거나 최소한 제목은 들어 보았을 이상의 소설 '날개' 첫 부분이다.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라는 말은 1930년대 일제강점기의 시대적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오래 폐병을 앓으면서 신경만 예민해 가던 자신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세상에 펼칠 수 없었기 때문에 남들이 알아듣기 어려운 암호와 같은 기괴한 말로 언어적 유희를 즐긴다. 이 천재는 극도로 피곤한 상태에서 담배를 피우며 아무 생각이 없는 상태가 될 때 '위트와 패러독스'를 포석처럼 늘어놓는다고 한다. 무슨 말을 굉장히 어렵게 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이 말은 요즘으로 치자면 다른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까지 '위트와 패러독스'(라고 자신이 생각하는 것)들을 포석처럼 늘어놓는 '아재 개그'를 그럴듯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박제가 된 천재는 '연애까지가 유쾌'하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 모습은 유곽에서 기생에게 얹혀사는 아주 '찌질한' 모습이다. 실제로 이상의 여러 소설에는 이런 비정상적인 연애의 모습이 나온다. 이상은 소설가 최정희에게 적극적으로 구애를 한 적도 있지만, 최정희 작가는 선산 출신의 영화감독 김유영과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나중에 '국경의 밤'으로 유명한 김동환 시인과 재혼을 했으니 그냥 혼자 좌충우돌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의지할 것 없는 세상에서 연애의 실패는 그를 더 박제로 만들었을 것임은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올해 우리 반에는 매일 3교시에 등교하는 학생이 있다. 벌로 무슨 주제로든 원고지 20매 이상 쓰라고 했다. 학생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글을 써 놓고 갔는데, 글을 읽으면서 가슴이 콱 막히는 느낌이 들었었다. 요즘 학생들에게서 볼 수 없는 독특한 경험들이 있었고, 그 이야기들을 엮어 나가는 솜씨, 거침없고 솔직하며 재치 있는 표현 때문에 몰입을 해서 읽었다. 이 학생이 글을 쓰는 데는 밑바닥을 경험하면서도 많은 사색을 했던 것이 가장 큰 잠재력이고, 천재성도 한몫했다. 그렇지만 지금 입시 제도에서는 오로지 잠재력밖에 없는 이 학생을 받아 줄 국문과나 문예창작학과가 없다. 이상은 박제가 되어서라도 천재성을 후대에 남겼지만 요즘은 가난한 학생들의 천재성이 박제가 되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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