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 백인 지배계급

입력 2016-05-06 19:47:12

미국 남부에서 노예제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노동력 착취라는 경제적 요인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노예제하에서 모든 백인은 노예를 다스릴 특권을 가진 귀족이라는 계급적 환상이었다. 이는 매우 강력한 마취 효과를 냈다. 당시 노예를 갖지 못한 가난한 백인도 자신이 지배계급임은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노예제는 백인들에게는 참으로 '민주적'이었다. 재산과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피부색 하나로 백인을 지배계급으로 만들어줬기 때문이다. 미국의 7대 부통령으로 노예제 옹호론자인 존 C. 캘훈은 노예제의 이런 '민주성'을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에게 사회의 커다란 구분은 부자와 빈자가 아니라 백인과 흑인이다. 그리고 백인은 빈부에 관계없이 모두 상층계급에 속하고, 동등한 존중과 대우를 받는다."

이런 관념은 제국주의 시대에 서구와 일본 등 제국주의 국가의 대중을 사로잡은 것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부르주아에 착취당하는 프롤레타리아도 예외가 아니었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에겐 조국이 없다"고 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강력한 제국주의 국가의 대중은 자신을 열등한 국가를 다스리는 지배계급으로 여겼고, 자기 조국의 제국주의에 기꺼이 동참했다. 대중의 이러한 '지배계급 욕구'는 제국주의 후발주자였던 독일의 경제사학자인 베르너 좀바르트의 언명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우리 독일인들은…신의 백성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당당히 고개를 치켜든 채 우리의 세상을 맞아야 한다. 독일의 새인 독수리가 지상의 모든 동물 위로 높이 날아오르듯 독일인도 까마득한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주변의 다른 민족보다 높은 곳에 있음을 느껴야 한다."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승리했다. 그 배경으로 가장 주목되는 것이 백인 중하류층 노동자의 지지이다. 이들은 자유무역 등으로 '미국이 손해 보고' '나도 피해를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이전에는 일등 국가의 '일등 국민'이었는데, 지금은 '이류 국민'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노예제가 폐지된 이후 미국의 노예제 옹호론자들도 이와 비슷한 박탈감에 시달렸다. '백인 지배계급'이란 환상이 '격세유전'되고 있다는 두려움이 밀려온다.

최신 기사